국내 여행기 등

당진시 면천읍성

아름답지만~ 2023. 9. 15. 21:09

우리는 당진시 하면 당진1,2,3동으로 생각되었는데, 역사적으로는 면천면이 과거는 아주 큰 거주지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 자리가 되었다. 송악의 지인과는 1999년 싱가폴 여행 이후 일년에 한 열번 정도 식사를 나누는 사이인데 점심만 먹고 헤어져오다가 좀 일찍 도착해 드라이브를 겸해 다녀왔다.

건치연혁(建置沿革)

백제(百濟)때는 혜군(槥郡)이라 칭()했다.신라 경덕왕(新羅 景德王) 때 혜성군(槥城郡)으로 개칭(改稱) 되었다. 고려 현종왕(高麗 顯宗王) 때 운주(運州)에 속()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열왕(忠烈王) 十六年에 현인 복규(賢人 卜奎)가 원()나라 태종(太宗)의 이자합단(二子哈丹)으 병()을 막아 공()을 세워 왕()에게까지 알게되어 면주(沔州)라 부르게 되었다.[몽산성 구축(曚山城 構築)]

이조 태종(李朝 太宗) 十三年부터는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다. 서기(西紀) 一九一四年 군면폐합(郡面 廢合)으로 당진군(唐津郡)에 편입(編入)되었다.

甲戌年 一九九四年 五月 日 수립(竪立)

당진 면천 읍성(唐津 沔川 邑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 91,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군자길 3일원

이 읍성은 1439(세종 21) 11월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샇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熾盛)과 옹성(甕城)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64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沃川)진잠(鎭岑)석성(石城)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는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연구에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면천읍성 복원정비계획 조감도

객사, 동헌, 내아, 외책실, 급창방, 사령청, 풍악루, 군기고, 군자정, 저자거리,

야생호동산, 진달래동산, 해자, 동문, 서문, 남문, , 건곤일초정, 진입광장,

주차장, 화장실

면천읍성(沔川邑城) 장청(將廳)

조선시대에는 왕궁(王宮)과 병영(兵營)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방(兵房)군교(軍校)들이 군무(軍務)를 보살피던 청사(廳舍)이다.

1872년 면천면 고지도애도 면천읍성 내 장청이 확인된다. 특히, 2017년 면천읍성 성안마을 조성을 위해 추진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1호 건물지 내 이총통이 출토되었다.

당진시에서는 2017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18년 장청을 다시 복원 하였다.

14일 방문한 면천 카페에서 들은 얘기로 16시부터 면천읍성 전통무예 재현 및 체험이 있다는데 객사 있는 곳에 행사준비를 해 놓았다. 그 증거만 디카에 담고 왔다.

풍락루(豊樂樓)

풍락루는 지금은 사라진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누각으로 정확한 기록이 없어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반월루라 하였으나 1852년 다이 면천군수 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고 풍락루기를 남겼다고 한다.

풍락루라 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노후와 붕괴될 위험이 있어 1943년 철거하였다가 2007년 철거 전의 사진자료를 토대로 하여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남문지의 모습과 현판 '원기루'의 모습

이후 복원이 완전히 된다면 그리 작지않은 성이 되겠으나 성내 주거지 이전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가 12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라 솔뫼성지를 차를 돌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