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일이 만만치 않고, 겨울철 폭설 등으로 동면을 하다가 눈 딱감고 공주로 향했다.
[10시 6분/집 출발-김피탕(공주시 한적2길 41-11)/11시36분~13시05분-공산성 주차장
/13시18분~13시53분-무령왕릉 및 왕릉원/14시~14시35분-집/16시 7분: 196km]



공주 공산성 유적관련
‘공북루’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 유적이다. 2011년~2017년까지 연차 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현재 지표면에서 약 300~700cm 아래에서 백제가 웅진에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 만들어진 약 70여 동의 기와건물지와 도로, 축대, 배수로, 저수시설, 석축, 연못, 철기 공방지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다. 백제왕궁관련 건물지가 자리한 곳은 약 30,000㎡의 넓은 평탄지를 이루고 있지만, 원래의 지형은 사방에서 물길이 모이는 골짜기에 해당한다. 나뭇가지와 흙 등을 켜켜히 쌓아서 다지는 부염공법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하여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축대와 도로•배수로를 만들고 기와 건물을 세웠다. 도로는 남북도로와 동서도로가 있는데, 남북도로는 약 600cm의 노면(路面)을 갖추고 있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계획적인 공간배치를 이룬다.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판 후 기둥을 세워 만든 기와건물로, 일정한 열을 이루어 자리하고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 ‘대통사(大通寺)’명 벼루와 사람 얼굴이 있는 기대, 공작 그림이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양의 벼루가 출토되어 백제시대 최고의 관청시설이 자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밖에 645년(의자왕 5)을 가르키는 ‘정관19년명(貞觀十九年銘)’이 있는 화려한 옷칠 갑옷과 철갑옷, 마갑 (馬甲), 큰칼(大刀), 장식도(裝飾刀) 등이 출토되어 백제 중앙의 선진적인 공예기술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백제 왕성으로서 명확한 역사성을 갖춘 공산성에서 백제 왕실의 생활문화를살필 수 있는 화려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된 왕궁관련유적이 조사됨으로써, 백제 웅진기 백제문화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공주: 공산, 무령왕릉원과 왕릉원/ 부여: 부영 왕릉원, 나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리사지/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堂)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 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
* 문루: 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은 처음에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 (雙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630)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 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 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1624) 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왕궁관련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루,진남루, 공북루, 영동류),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 경계에 있는 송산(松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한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 왕과 왕족의 무덤이다. 총 1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현재는 ‘공주 무령 왕릉과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1)과 벽돌무덤2) 두 종류로 구분된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을 쌓아 무덤방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 형태로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무덤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3)이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은 도굴로 인해 껴묻거리(부장품)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무덤 형태의 차이로 백제 웅진 도읍기 백제 왕족 무덤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무덤으로, 출토된 유물을 기초로 우리나라 고대무덤에서 유일하게 누가 매장되어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백제 웅진 도읍기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굴로 백제 왕실 무덤의 주인공과 조성 시기가 확실히 밝혀짐에 따라 명칭만으로도 무덤의 주인을 쉽게 알 수 있도록 2021년 9월17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 굴식돌방무덤: 돌로 무덤방(널방)을 만들고, 방의 한쪽에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만든 뒤 흙으로 덮어씌운 무덤,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고도 함.
2) 벽돌무덤: 구운 벽돌로 만든 무덤이라는 뜻으로 전축분(塼築墳)이라고도 함
3) 널길: 무덤 입구에서 무덤방(널방)으로 연결되는 통로
웅진시대 연표(대 64년)
477년 심근왕 즉위 501년 무령왕 즉위
538년 사비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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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문주왕 웅진 천도
479년 동성왕 즉위 523년 성왕 즉위




무령왕릉 및 왕릉원 입구(上), 무령왕릉 모형전시관(中), 멀리서 본 6호분 입구(下)



고분군 보존상의 문제로 1997년 7월15일 문화재청의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내부관람이 중지되었 습니다. 소중한
문화재의 영구보존을 위해 관람객 여러분의 양해를 바라며, 모형관에서 실물과 같은 고분 모형을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번갯불에 콩튀겨먹듯 다녀온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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