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구문소
추억이 있는 이 곳, 우리는 이곳을 협곡열차 타고와 둘러보면서 몸이 않좋은 친구 댁 때문에 좀 색다른 기록이 있다. 봉화 백두대간 수목원을 향하다가 조금 방향을 틀어 추억을 되씹어 볼 기회를 가졌으나 물 흐름이 부족해 감동적이지는 못했었다.
구문소 지역 안내도
▯자개문: 자연이 만든 구문소의 거대한 석굴로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여겼다.
▯마당소: 마당처럼 넓은 소로 구문소를 말하며 과거에는 뱃놀이도 하였다.
▯인공석굴: 1930년도 태백지역 석탄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인이 뚫은 인공굴
▯닭벼슬바위: 닭의 벼슬처럼 생긴 바위로 구멍이 뚫려있어 구멍바위라고 한다.
▯퉁소: 여울목과 마당소 사이에 10m길이로 형성된 통처럼 생긴 소(沼)
▯여울목: 용소에서 흐른 물이 폭포를 이루며 생긴 급한 여울
▯용소: 삼형제 폭포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소(沼)
▯삼형제폭포: 옛날 용소에서 익사한 삼형제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 바위절벽을 치고 올라가며 생긴 폭포
▯용헌: 옛날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제수로 사용하였던 물
▯자개루: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구문소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소(沼): 땅바닥이 둘러 빠지고 물이 깊게 고인 곳
고생대의 신비, 구문소
구문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돌문을 만들고 그 아래 깊은 물웅덩이가 생겼다는 뜻의 ‘구문소’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구문소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곳으로 두 물길이 원래 지하에 있던 동굴과 만나 점차 동굴을 넓혔고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의 모습의 지형을 만들었다. 구문소의 독특한 지형을 보면 5억 년 전 고생대 지질시대에 한반도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고, 바다 환경에서 만들어진 석회 암층에 나타난 다양한 퇴적 구조와 삼엽충 등 옛 생물의 화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지질 과학 체험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⑧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오전약수는 몇 번을 다녀갔지만 이곳은 수목원 이전에 한번 지나가 큰 마음을 먹고 들렸는데 생각 보다 규모가 엄청났지만 겨울을 지난지가 얼마 되지 않아 봄의 기운을 느끼기엔 부족한 편이나 호랑이 숲의 방사한 호랑이가 여유로운 모습엔 위안을 느낄 수 있었고, 광활한 면적은 시간 여유를 가지고 방문하면 힐링의 기운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백두산 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
우리나라 선조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한편으로는 경외 받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를 ‘산군(山君)’ 즉 숲의 주인이라 칭하며 숭배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먼 옛날 부터 호랑이에 대한 큰 관심을 이어나가 88올림픽에서는 국민 응모 1위로 호랑이가 투표되어 올림픽 마스코트로 선정되었고, “한반도의 모양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다.” “국민성이 호랑이의 기상을 닮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사랑 받는 호랑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한청(♀) 2005년 5월 8일생, 수목원 호랑이숲 안방마님,
강한 여자지만 수줍음도 보여주는 팔색조의 매력
우리(♂) 2011년 9월23일생,
다툼, 투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지만 한청이에게 만큼은 장난꾸러기
한 (♂) 2013년10월29일생, ‘도’와 남매
가장 뛰어난 야생 본능을 가진 호랑이, 머리도 크고 식욕도 뛰어난 건강한 대식가
도(♀) 2013년10월29일생, ‘한’과 남매
조심성이 많고 소심하지만 가장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미스 호랑이
태범(♂) 2020년 2월20일생, ‘무궁’과 남매
장난감에 진심인 편, 동생의 짖궂은 장난도 잘 받아주는 착한 오빠
무궁(♀) 2020년 2월20일생 ‘태범’과 남매
호기심이 왕성하고 일단 움직이는 행동파, 수목원 대표 말괄량이 호랑이
방사된 호랑이는 도(♀)로 발정기가된 숫놈은 사나워져홀로 방목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튜립 싹이다 이곳 백두대간 수목원은 고도가 높아 절기상 이른 보미다.
⑨ 영주 부석사
부석사는 이 근처에서 차를 편하게 주차시키고 점심 먹기에는 편한 곳이다. 부석사를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일주문까지만 산책하고 떠났다. 제대로 방문한 것도 너댓 번이기에 생략하고 새로운 도로를 따라 김삿갓 유적지로 갈 부푼 꿈으로 일찍 떠났다.
⑩ 영월 김삿갓 유적지
첩첩산중을 시원스럽게 뚫은 길은 운전을 하면서도 흥분스러웠고, 김삿갓 유적지는 서너 번 방문해 새로워진 몇가지를 빼면 눈에 익은 장면들이 허다했지만 김삿갓 유적지만을 찾은 건 개발 초기엔 곰봉의 등산과 민화박물관과 고사리 채취를 겸한 산행이었기에 마대산 쪽은 낯선 곳이었다.
정암(靜巖) 박영국선생(朴泳國先生) 공적비(功績碑)
정암(靜巖) 박영국선생(朴泳國先生)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조인 고려 호장(戶長) 응주(應珠) 공의 24세손으로 1917년 9월13일 영월군 주천면 용석리에서 출생하셨다. 평생을 향토사학에 전념해 오시면서 주천면 금마리 독립만세상 건립, 수주면 도원리 삼공제명석(三公題名石) 복원, 영월읍 방정리 생육신 조여비원 건립을 비롯 향토민속놀이의 발굴 전승에 크게 기여하셨다. 특히 선생께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이 십승지 (十勝地)인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내력을 밝히고 그가 살던 집터와 묘를 찾았다.
또한 김삿갓 유적 보존회를 구성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유시(遺詩)를 수집하여 「김삿갓의 유산」 책자를 발간하는 등 김삿갓 유적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 금번 「제2회 난고 김삿갓 문화 큰잔치」를 개최하면서 선생의향토 문화 사랑에 대한 큰 뜻을 후세에 오래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1999년10월16일 영월군수 김 태 수 세움 한뫼: 김해동, 춘정: 이근우
1.8km 김삿갓 주거지까지 30여 분 올라가 무척 아내가 힘들어 했다. 4월 1일 우리 걸음이 2만보가 넘었었다.
난고 김삿갓 주거지
이 곳은 조선조 말엽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곳이다. 선생은 안동 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순조 7년(1807)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 이씨 사이의 인ㅁ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병연 호는 난고이다. 순조12년 (1812)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으면서 홍경래에게 항복하여서 역적으로 몰려 폐족처분을 받아 가족이 영월로 옮겨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모친은 자식에게 조부의 사연을 감추고 글을 가르쳤으며, 20세 되던해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에 응시하여 조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다.
그 후에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시로 읊어 서민문학의 큰 틀을 마련하였다. 1863년 전라나모 화순군 동복에서 작고하여 그 곳에 묘를 썼으며 삼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로 옮겨 모셨다.
1982년 김삿갓의 주거지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서 살았던 엄운섭(당시 64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경 주거지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아서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화전촌의 집은 모두 통나무로 짓는 것이 관례인데 이집 본채 자리 철거목재는 기둥,천장보,도리 등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양반댁의 안목 있는 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도의 얼 선양사업 일환으로 2002년 9월에 복원한 것이다.
⑪ 의림지
제천의 산들은 꽤많이 다녀갔건만 농경문화의 발상지인 의림지는 너무 늦게 찾았다는게 이상할 정도였다. 막상 방문해 보니 수원 축만제도 역사가 있지만 대적할 수 없는 빼어난 규모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으며 제방 쪽 제림이 유난스레 싱싱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고, 방문객들이 많아서 틈새를 걷는 기분으로 거의 구석구석 들여다 보았다.
제천 의림지와 제림(堤川 義林池와 堤林) 명승 제20호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로 호반의 둘레는 1.8km이고 수심은 8m이다. 제방을 따라 소나무,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라 불린다. 물과 숲이 주변의 영호정(暎湖亭) 및 경호루(鏡湖樓) 등과 함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호서(호서; 호수의 서쪽)라는 충청도의 다른 이름은 의림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내제 (奈堤;큰제방)라는 제천의 옛 이름도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림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는 설과 조선시대 현감인 박의림이 쌓았다는 설이 전해져 왔으며, 지명분석에 근거한 삼한시대 축조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림제라고 하고 정인지에 의해 두 차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항일운동기인 1914~1918년까지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으며, 1972년의 장마에 둑이 무너진 것을 이듬해 복구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설로는 거북바위를 돌려 놓아 부자집이 몰락하였다는 이야기와 탁발승을 홀대하여 부자집이 몰락하고 그 자리에 저수지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리고 의림지에 있는 큰 이무기가 가끔 나와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었는데 어씨 오형제가 이무기를 잡은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게 되었다는 어장사참사가 (魚壯士斬蛇歌)가 전해지고 있다.
제방 아래 용추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흐르는 협곡
용추폭포(용터지기)
신월동에서 온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터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 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문을 개문하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용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하여 용폭포라고도 한다.
주변 모산동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용이 터져 죽은 곳이라 하여 “용터지기”라고 부른다.
영호정(暎湖亭)
영호정은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의림지 남쪽 제방 위에 위치하며 조선 1807년(순조 7) 이집경 (李集慶)이 세운 후, 6.25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그의 후손인 이범우(李範雨)가 1954년에 고쳐 지었다. 이범우는 3.1운동 때 제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미의병 창의 당시 제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이강년(李康秊)이 제천 천남전투에서 승리 후 1907년 음력 7월에 이곳 영호정에서 부하 장수들과 작전과 전술을 논하였으며 도창의대장 (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건축된 나무로 만든 단층의 정자로 팔작지붕*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팔작지붕: 지붕 양측면에 합각(삼각형의 벽)을 지닌 지붕
⑫ 남천동성당
제천관광호텔에서 1.8km 떨어진 제천약초시장까지 걸으면서 지나쳐서 되돌아 가는길에 들렸던 곳이다. 지대가 다소 높은곳에 위치해 시원스런 느낌이었다.
남천동성당
원주교구 제천지구 10개 성당(청전동성당, 의림동성당, 신백동성당, 서부동성당, 백운성당, 배론 성당, 매포성당, 단양성당, 남천동성당, 덕산성당) 중의 한 곳으로 제천지역 최초의 성당이다.
◎ 연혁: 1939년 용소막성당을 모본당으로 제천공소 설립/1940년 본당 승격/1947년 한옥성당 으로 개조 봉헌식/1956년 새성당 봉헌식/1958년 청주교구 신설로 소속변경/1965년 제천성당 에서 남천성당으로 명칭변경/1969년 원주교구로 관할 변경/1978년 성모동굴 축성식/1993년 새성당 봉헌식/제천의 모성당이다.
⑬ 제천 한산사
제천약초시장 가기가 바빠 되돌아오는 길에 들리려 했으나 남천동성당의 입구가 다른 길에서 들어가게 되어 남천동성당에서 원경만 담은 곳이다.
한산사 제천 중심부의 사찰
한산사(寒山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제천지역 중심부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창건은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보면, 고려 명종 24년(1194년)에 조혜사 (照慧寺)로 창건 되어 법등을 밝혀오다가 1934년에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과정에서 한산사로 개칭하였다. 1984년 현해스님이 법당과 요사체를 중창했고, 2003년에 주지로 부임한 동범스님이 경내에 모셔 있는 마애석불 부처님을 2004년 10월 ‘제천 한산사 석조여래입상(提川 寒山寺 石造 如來立像)’으로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45호 지정 받았다. 또한, 큰법당 요사채 도량 등을 재정비 보수하고 전통사찰의 법등을 이어가기 위하여 2005년 12월에는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 사찰로 지정 되었다. 2007년 5월에는 큰법당 기와 보수불사를 마무리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가람 수호를 통하여 도심속의 전통사찰로서 수행과 포교의 중심도량으로 잘 가꾸어 나가고 있다.
◎제천 한산사 석조여래입상 -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2004년 10월 22일 지정)]
고려 말기의 불상 양식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석불은 높이 2.8m이며 벽돌로 만든 대좌 위에 세워져 있다. 대좌를 제외한 몸체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돌기둥형이다. 윗면보다 아랫면이 더 넓고 옆면은 넓적한 형태이다. 정면은 부조형으로 조각되어 있고 좌우 옆면과 뒷면은 아무것도 조각되어 있지 않다. 석불의 얼굴은 타원형으로 얼굴에 비해 코가 큰 편이다. 눈끝이 날카로우며 입은 살짝 벌린 채 미소를 띠고 있다. 불상의 전체적인 조각 수법은 선을 하나하나 조각한 수법이다.
*둘쨋 날의 기록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시 준비해 셋쨋 날을 이어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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