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사찰(寺) 등의 여행-5

아름답지만~ 2012. 4. 8. 21:46

 

※ 경덕왕릉(景德王陵)<1호 고분>

삼한시대 부족국가이던 조문국(소문국)이 이곳에 도읍하여 신라 벌휴왕2년(185)에 신라 문화 권에 병합 되기 전까지 인근 고을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조문국의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 봉 아래에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먼 옛날 외밭이었던 묘역을 발견하 고 수호하게 된 데에는 의성현령의 꿈에 의하여 발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을 조선 숙종때 편간된 허미수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해마다 봄철이 되면 한 번씩 관 민 일동이 여기서 춘계행사를 지내고 있다.

분구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전면에는 가로42cm, 세로22cm의 비석이 있다.

                고분군과 1호 고분 경덕왕릉

※ 3호 고분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 3호 고분은 밑지름이 14.3m~10.7m내외, 높이가 3m정도였으며, 한 봉분 안에 돌무지덧널무덤(1곽), 덧널무덤(2곽), 유사돌무지덧널무덤(3곽) 등 3기가 순차적 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1곽은 길이5.8m, 너비3m, 깊이0.7m, 2곽은 길이5.3m, 너비2m, 깊이 0.3m정도로 두 기는 규모가 비슷하고 11자형으로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1곽에서는 금귀걸이, 삼엽문대도, 은허리띠 등 장식품이 주로 출토되었고, 2곽에서는 많은 량 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 6호 고분

낮은 언덕의 남쪽 비탈에 축조한 원분으로서 분구의 크기는 밑둘레의 동서지름이 20m, 남북 지름21m이고 높이는 북쪽에서 2.5m, 남쪽에서 4m이다. 분구 안에는 적석목곽의 제1묘곽과 장방형의 토곽인 제11묘곽이 있다. 제1묘곽의 출토 유물에는 금제세환귀걸이•은제과대장식•은 제교구 등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 소화두대도• 철모• 철촉• 철착 등 무기류와 꺽쇠가 있 고, 또 장경호• 단경호• 광구평저소호• 고배• 고배뚜껑 등 토기류와 길이 11cm나 되는 대퇴골 편이 있다. 제11묘곽에서는 홍색• 갈색의 유리구슬과 장경호• 유개호• 고배• 고배뚜껑 등 토 기류가 출토되었다.

               고분군에서 아내, 다른 부위에서 본 고분군 안내도

※ 삼우당(三憂堂)문익점선생 면작 기념비(文益漸先生 綿作 記念碑)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금주성(錦州城) 에서 면화 종자를 붓뚜껑(筆管)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丈人)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 산청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승노(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제오리(金城面提梧里)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리 현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 鉉)도지사 재임시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 를 세운다. <1991년12월 일 義城郡守 신상철(申庠徹)>

                삼우당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와 조문국의 기마군사상

※ 의성 제오리공룡(의성 제오리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제373호/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300여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발자국 화석은 지금부터 약1억년전 (중생대 백악기초엽)에 공룡들이 이곳을 흐르던 옛 강가의 뻘밭을 산책하다가 남긴 발자국인 것이다. 이들 크고 무섭게 생긴 파충류들은 중생대 중에 번성하였으나 6,600만년 전까지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먹이의 변화와 운석 충돌설 등의 몇가지 설이 있지만 운석충돌설이 가장 유력하다.

                의성 제오리의 공룡발자국 화석들

14) 고운사(孤雲寺):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新羅 神文王)원년(681)에 의상조사(義湘組師)가 창건하고 그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대사(大師)와 함께 중건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으 며, 석학(碩學)으로 이름 난 함홍선사(涵弘禪師)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500명의 대 중스님이 수행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14개 군의 사찰을 관장하며 암사와 전각이 366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고운사 입구문과 천왕문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으로는 도선국사가 조성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과 가운루(駕雲 樓)• 삼층석탑• 연수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28동의 고건물이 유존하고 있다. 송림 이 우거진 등운산(騰雲山)에 위치한 고운사는 속세에서 저만치 있는듯한 청정수행도량으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서 5개군에 걸쳐 60여 말사를 관장하는 거찰이다.

※ 고운사 가운루(孤雲寺 駕雲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이 사찰은 신라 신문왕 원년(681) 의상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고운사(高雲寺)라 이름하였다. 그후 고운 최치원(857~?)이 여지• 여사 양대사 등과 함께 가운루(駕雲樓),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여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고려 정종(定宗)3년(948)현종(현종)9년에 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 의 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헌종)원년(1835) 소실되어 만송, 호암, 수월선사 등 이 중창하였으나,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양식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초익공(初翼工)계인데, 건물의 귀퉁이에 세워진 기둥만 2익공으로 꾸며진 것이 특이하다. 가운루(駕雲樓)의 길이는 16.2m에 최고 높 이가 13m에 달하는 대규모 누각으로 3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계곡 밑에서부터 이 거대한 몸 체를 떠받치고 있다.

                고불전 건물이 아담하고, 가운루가 계곡 위에 걸터 앉고

※ 고운사 연수전(孤雲寺 延壽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4호/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이 건물은 조선 영조20년(1774)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 었으며, 1887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연수전의 구조는 만세문(萬歲門) 현판이 걸린 솟을 대문에 사방 담을 쌓고 가구식 기단에 겹처마 형식의 팔작지붕이다. 또한 연수전은 평면형태가 사찰의 여타 전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숭유억불시대 에 사찰내에 배치된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연수전의 다른 방향에서 보고

※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孤雲寺 石造釋伽如來坐像)<보물 제246호/단촌면 구계리116번지>

이 불상은 높이79cm이다. 불상 받침인 대좌와 불상뒤 원광인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다. 크지 않으며 코에 인중이 뚜렷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다. 아랫입술 중앙이 오목하게 파이 고 턱은 살이 붙어 이중으로 되어있다. 양쪽 귀도 얼굴에 비해서 작은 편이고, 굵고 짧은 목 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치켜 올라간 어깨로 인해 목은 더욱 짧아 보이고 가슴은 잘 발달되어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들어 낸 우견편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밀집 된 같은 간격의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불상은 솟아오른 살에 불분명한 머리, 짧은 두귀, 네모진 상체에 나란히 흘러내린 옷주름선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약사전과 그 안에 모셔진 고운사석조여래좌상

15) 회룡대(回龍浦):

회룡포(回龍浦)는 낙동강(洛東江)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용(龍)이 비우(飛祤)처럼 물을 휘감 아 돌아간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0m의 비룡산(飛龍山)을 다시 350⁰되돌아서 흘러나가는 「육지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룡산에 는 숲속 등산로와 산책코스가 있다.

이 산에는 천년고찰인 장안사(長安寺)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는데 깍아지른 듯한 이곳에는 삼한시대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산성(圓山城)이 있다. 천혜의 요새로 된 토석혼 축(土石混築)으로 된 성 주변에는 많은 고분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熢首臺)가 남아있다.

백제시대 온조가 남하할 때 마한 최후의 보루인 이곳 원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를 세웠다고도 전해지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상당기간 백제의 요새로서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 마나 격전지였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오면 성아래 마을인 성저마을에 아비 규환과 원혼의 소리가 들려 온다는 전설이 있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 하다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나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인근에는 용궁향교, 하마비, 황목근(천연 기념물), 무이서당, 산택지(연꽃) 등이 있다. 역사적 정 취가 살아 숨쉬는 이곳 회룡포 백사장과 비룡산은 야영과 민박이 가능하다.

                제2뿅뿅다리모습과 33년만의 재회를 한 전종백원장

 

                우리네와 전종백 원장네

※ 비룡산 봉수대(飛龍山 烽燧臺)<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봉수는 옛날에 통신수단의 하나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여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 를 도성(도성)에 신속히 전달하였다. 봉수는 홰수(홰수)에 따라 1홰 평상시, 2홰 적출현, 3홰 국경접근, 4홰 국경침범, 5홰 적군교전으로 구분하여 알렸다.

비룡산 봉수는 동쪽으로 예천읍의 서암산(서암산), 서쪽은 다인의 소이산(소이산), 북쪽은 산 양의 가불산(가불산)봉수와 연락하였으며, 설치년도는 고려 의종(의종)3년(1149)에 세워진 것 으로 추정하며,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없어진 것을 예천군에서 사방3.7m, 높이 2.7m의 장방형 규모로 복원하였다.

※ 1759년도 씌여진 장안사 극락전 상량문

학이 춤추듯 뭇봉우리 힘차게 굽이치는 곳에 부처님의 전당이 세워졌나니, 천년전 신라때 창 건되었다. 구름을 달아 놓은 듯 비룡이 꿈틀거리는 산마루 천상의 정기 서린 곳.

불꽃같은 신심으로 부처님을 지키고 구름이 굽이굽이 감싸는 곳에 오래오래 불도를 베풀던 장안사, 신령스럽고 보배로운 도인의 넋이 도우며, 도량이 맑고 맑아 천운이 찾아 든다.

오랜 세월 장마와 습기에 허물어진 당우를 세우며 재물을 모으고 목수를 불러 화장계 부처님 의 가피(加被)로 다시 이루도다. 신령스럽고 황홀함에 하늘, 땅이 감탄한 연화세계, 삶도 죽음 도 뛰어넘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함인가. 푸른 연기같이 그윽한 아침 저녁 예불소리, 가람의 자태가 엄연히 다시 나타나도다.

동쪽에 대들보 걸치니 학가산에 광명이 비치고 몸은 푸른 학을 타고 구름속 허공을 유영하도 다. 서쪽에 대들보 걸치니 높고 뾰죽한 산 봉우리에 구름이 감돌아 중봉산은 서로서로 읍을 하고 봉황이 와서 해를 타고 앉는구나. 남쪽에 대들보 걸치니 비단같은 아홉 봉우리는 병풍을 이루고, 삼강(三江)은 사이좋게 서로안고 흐르네. 북쪽에 대들보 걸치니 좌청룡 우백호가 푸른 색을 더하고 동네마다 사람들이 불사를 받드니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충만하리라.

상,하로 대들보 걸치니 찬란하 별빛은 저마다 설법하고, 떨어지는 빗물은 밤낮으로 힘차며 단 청의 은은함은 빛나는 강물의 푸르름이어라. 엎드려 바라옵나니 저희들이 더욱 수행 정진하여 모든 재앙이 소멸되고 만민이 안락하고 구경에는 성불하여지이다. 계수나무 가지에 꽃 피고 햇살 비추듯 거룩한 문수보살의 참된 보살행이 이 땅에 충만하여지이다.

건륭24년(1759) 기묘 3월 초열흘 사시 화주승 법림(法淋)

               제6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