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모임에 참석을 못하여 이번 모임은 꼭 참석해 반가운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 모임도 4명이 모이는 조촐함으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이상득,이성탁,이세원,박해병 이며 온양온천시티투어를 이용해 송악의 외암민속마을과 현충사를 거쳐 아산온천을 들리고 온양온천역으로 돌아오는 수요일의 스케즐이나 우리들은 현충사까지로 했다.
위: 외암리의 돌담장, 아래: 현충사 로타리의 반송
1. 모인 날: 2012년 8월22일수요일 10시
2. 모인 곳: 온양온천역<역 앞 관광안내소 10시40분 출발>
3. 다닌 곳: ①외암민속마을-버스를 주차장에 대니 빗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하천물이 우렁차게 흐른다. 몇 번을 다녀 갔지만 이렇게 많은 물이 흐르는 건 처음이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 7명과 안내를 맡은 유씨 성의 아줌마 단촐하게 설명하면서 한바퀴를 돌아봤다.
위: 외암리 하천의 많은 물줄기, 아래: 단촐한 관광객이 외암민속마을로
수령 600년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는 농촌체험운영사무실(Tei: 041-541-0848/ 018-627-9255)이 있는데 민박 등을 운영한단다. 외암사당은 흙길이라고 들어가는 길을 보고 우회해서 참봉댁(연엽주를 만들고 있었음)을 거치고 송화댁을 지나서 참판댁을 지나 교수댁을 경유해 입구에서 20여분 자유시간을 준다.
위: 600년된 느티나무, 아래: 외암사당 들어가는 길목
위: 참판댁, 아래: 교수댁
※ 보호수 품명: 도(道)나무, 고유번호: 8-89, 수종: 느티나무, 지정일자: 1982.11. 1
수령: 600년, 수고: 21m, 나무둘레: 5.5m
느티나무 목신제는 장승제와 함께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의식으로
매년 음력 1월14일 외암민속마을 보존회 주관으로 실시되고 있다.
※ 참봉댁(參奉宅): 이 집은 이시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
1955) 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이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ㅡ’자형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2열로 평행 배열된 ‘〓’자 집이다. 약 6m정도의 거리를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정면 길 이는 같고 측면(側面)의 폭은 서로 다르게 하였다.
※ 송화댁(松禾宅): 이 집은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이라는 택호(宅 號)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시종의 9세손으로 호가 초은(焦隱)이며, 순조10년 식년시에서 감사가 되었다.
송화댁은 앞쪽에 ‘˩’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자 모양의 안채를 두었 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건물과 건물사이 가 조금씩 떨어진 튼 ‘□’자 집을 하고 있다. 넓은 사랑(舍廊)마당에는 정원을 꾸 몄는데, 사람의 손길을 많이 주지 않아 자연미가 절로 흘러 넘친다. 마을 상부에 서 흘러온 물길을 적당히 굽이치게 하고, 물길 주위에는 주변의 돌을 놓아 마치 산 속에서 만난 계곡과 같다. 정원의 수목도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을 심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 아산외암리 참판댁(參判宅): 외암리 민속마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목조 기와집 두 채이다. 큰 집과 작은 집이 있는데 별개로 배치되었다.
큰 집은 안채(10칸‘ᄀ’자형),사랑채(5칸‘―’자형),문간채(8칸‘―’자형)가 있으며, 작 은 집은 안채(6칸‘ᄀ’자형),사랑채(7칸‘ᄀ’자형)로 구성되었다.
큰 집은 돌담을 둘러서 집안의 공간을 구분하고, 대문앞에 돌담을 쌓아 아늑함을 주는 등 공간분할을 운치있게 하였다. 작은 집은 사랑방 앞에 대청 양쪽 전체에 드리는 긴 창살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둔 고방(庫房)을 설치하여 과방(果房),툇마 루 등 여러 용도로 이용하였다.
평면 구성은 대체로 대청이 안방 구들에서 꺽여져 놓이는 중부 방식이지만 작은 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말 규장각 직학사(直學士)와 참판(參判)을 거친 퇴호(退湖)이정렬(李貞烈)이 지은 집이라 전 한다.
※ 교수댁(敎授宅): 이 집은 이시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천거되어 성균관(成均 館)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宅號)이다.
원래 사랑채,안채,행랑채,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사당만 남아있 다.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자 모양의 안채를 둔 ‘□’자 집이었다.
이 교수댁 정원은 건재고택,송화댁과 함께 외암마을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정원의 크기는 건재고택이나 송화댁보다 작지만 인위적으로 꾸민 정원은 다른 지방의 양반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설화산에서 흘 러온 수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여 굽이치게 하고, 연못을 만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목으로 정원수로 심었다.
② 현충사-외암민속마을을 나온 버스는 선장쪽 우회도로를 거쳐 염치읍에서 39번국도를 타고 현충사로 들어가 시티투어 일행과 작별한다.(12시36분) 우리는 우선 점심을 채우고 경내로 들어가 먼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둘러보고 새로 생긴 타루비(복제품)를 지나 충무문을 들어서고 아름답게 정리된 정원수(쉬땅나무,반송)를 지나 연못을 둘러보고 나왔다.
위: 새로지은 기념관, 아래: 비록 복제품이지만 막하 군인들이 세웠다는 타루비
위: 연못의 비단잉어 무리, 아래: 기념관의 거북선 모형도
길가의 나무들을 보며(반송,화살나무,모과나무) 로타리를 지나 본전인 현충사로 향하는 다소 오름길로 충의문을 들어선다. 경내는 우람하게 자란 배롱나무가 화사한 꽃으로 단장한체 우리를 반기는 듯 했다. 현충사 경내에는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우측에는 종업원이 탐방객을 반가히 맞는다. 우리는 엄숙한 태도로 영정을 향해 예를 갖추고 물러나오며 그는 우리에게는 신적인 존재를 얘기하며 일본의 독도에 대한 무모한 집착을 응징하는 시의적절한 시기의 방문을 자위한다.
위: 멀리 반송이 있는 로타리(사거리) 직진하면 본전인 현충사, 아래: 현충사
위: 배롱나무와 아래: 현충사 본전 옆의 대나무 숲
돌아나와 옛집과 활터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길가의 정원수(왕버들,야광나무,모과나무, 고광나무)를 지나 충무정에서 냉수를 한 바가지씩 먹고, 옛집에 들러 뒤뜰의 화사하게 핀 상사화를 보고 활터에 올라 이충무공 후손들의 묘를 보고, 과녁이 설치된 남향의 잔디 넘어를 보고는 소나무 숲길을 거쳐 입구로 나왔다.
위: 충무정의 모습, 아래: 옛집 모습
위: 이충무공 후손들의 묘, 아래: 3대 이면의 묘소 가는 길
※ 타루비(墮淚碑) 복제품 보물 1288호
이 석비(石碑)는 조선(朝鮮)중기의 명장인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장군(將軍)의 유덕 (有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선조(宣祖) 36년(1603)에 세워졌다.
석비의 형태는 화문대석(花文臺石)위에 연화비좌(蓮花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우 고 운문(雲文)과 연(蓮)봉오리형으로 이루어진 개석(蓋石)을 얹었으며, 비문에는 비의 명칭 에 대한 유래(由來)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써 있는데, 영하수졸위통제사 이순신입단 갈명 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호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營下水卒爲統制使 李舜臣 立短喝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영하의 수졸들 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중국 양양 사람들은 양 호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시에서 인용한 것이니라.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 충무정(CHUNGMU WELL 忠武井)
이 충무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로서 현재는 참배객의 식수로 활 용되고 있습니다. 깨끗이 사용하시기 바람니다.
※ 옛집(ADMIRAL YI'S HOME 古家 旧家屋)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사시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일부는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 뒤편에는 충무공의 위패(돌아가신 분의 작은 나무패)를 모신 가묘(집안내 사당)가 있어 매년 기일(돌아가신 날:음력11월19 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활터(ARCHERY RANGE 弓場)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
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반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 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이충무공 후손의 묘
이 곳 묘소는 위에서부터 이충무공의 3대,4대,10대손의 묘입니다. 이충무공의 묘소는 이곳 으로부터 서북쪽 약9km 거리에 있는 아산시음봉면 삼거리(어라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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