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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시립대 수의과) 돌아보기<2012. 9.15>-1

아름답지만~ 2012. 9. 18. 23:11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은 1955년도에 창설되어 143만㎡(약43만평)대지위에 16만5천여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안식하고 있는 민족의 성역입니다. 정문에서 보이는 곳에는 현충문(顯忠門)과 현충탑이 있으며 현충탑 안에는 6•25전쟁 당시 산화하고도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4천여 장병들을 위패(位牌)로 모시고 있고 현충탑 안의 지하 봉안실에는 유해는 찾았으나 신원을 식별할수 없는 7천여 용사들의 영현을 봉안(奉安)하고 있습니다.

묘역(墓域)에는 리승만 대통령 내외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김대중 대통령 묘소를 비롯하여 상해 임시정부 요인,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군인, 경찰관, 예비군 등의 영현(英顯) 5만4천여 위가 신분별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주요 시설로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활동모습이 담긴 영화 상영 및 안장식 등의 각종 의식 행사를 하는 현충관을 비롯하여 애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는 사진전시관과 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이분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는 각종 추모탑이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은 단정한 차림과 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고 참배(參拜)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참조>

                                                   위: 국립서울현충원 안내도, 아래: 정문에서 본 입구모습

1. 우리가 다닌 코스: 10시가 되니 모인 선후배 11명은 현충원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10시 5분) 좌측 산책길로 현충지(연못)를 지나 현충관과 좌측의 사진전시관, 우측의 유품전시관을 지나 27묘역은 노력봉사 중인 봉사자들이 깨끗이 정리 중이었고, 29묘역은 제초와 청소가 끝난 곳을 지나 솔냇길로 올라 유격부대 전적위령비와 육탄10용사현충비에 들려 참배하고 솔냇길을 계속 따라 산책 나온 분들과 어울리는 듯 걸어갔다.

                                                         위: 현충지의 수련화, 아래: 사진전시관

                                                                       위: 현충관, 아래: 유품전시관

                                       위: 27묘역은 자원봉사자가 깨끗이 하고있고, 아래: 29묘역은 벌써 깨끗이 정비됨

                                                     위: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 아래: 육탄 10용사 현충비

※ 유격부대전적위령비

이 비는 6•25전쟁 중 조국과 자유를 위해 북한지역 곳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유격작전을 수행하다가 산화한 유격부대원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그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7년 6월 2일 국방부 주관하에 세워졌다.

유격부대는 반공 청년들을 중심으로 규합한 자유의 의병으로서 한국반공유격대의 백령기지 산하 24개부대, 강화기지 산하8개부대, 속초기지 산하5개부대, 덕소공수기지 산하4개부대와 호림유격부대, 영도유격부대 등이 있었다.

이들 유격부대는 무장봉기, 군사정보수집, 군사시설 파괴 등을 수행하며 적의 후방지역 교란과 군사작전을 전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비의 전면 좌측에는 유격부대 약사, 우측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한국반공유격대 참전부대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육탄 10용사 현충비

광복 후 국토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어있던 6•25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5월 3일 미명을 기해 북한군이 개성 송악산 지역의 우리측 고지를 기습 점령하자, 이튿날 당시 육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0명의 용사가 이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몸에 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 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토치카를 폭파함으로써 실지를 탈환케 한 이들 10용사의 명복을 빌고 추모하며 그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세운 비이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과 개성의 독지가, 일반 유지 등이 국방부의 지원 하에 1955년 4월에 준공하고 육탄 10용사가 산화한 날인 5월 4일을 기해 제막하였다.

육탄 10용사는 서부덕 소위를 비롯하여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오제룡, 박창근 상사이며, 이들은 제6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위: 길가의 쑥부쟁이, 아래: 대한수의사 회장 김옥경과 최원식 선배

삼거리 이정표(←출구<정문>/이승만대통령묘소 350m/김대중대통령묘소 150m,↑솔냇길)에서 이승만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묘소를 향한다. 가는도중 이곳이 원래 창빈안씨의 묘가 있던 국유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위: 창빈안씨 묘역입구, 아래: 김대중대통령 묘역에서 본 창빈안씨 묘역

※ 창빈안씨 묘역(昌嬪安氏 墓域)<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16세기 후반~17세기 후반>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번지<국립현충원 내>

이곳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묘역이다. 원래는 1550년(명종5) 3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묘소를 만들었는데,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묘역의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고 봉분 뒤에는 곡장을 설치하였다. 신도비를 비롯하여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등의 석물을 세웠다.

창빈안씨는 1507년(중종2)에 아홉 살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입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품계가 올랐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후손이 없는 명종을 이어 제14대 임금(선조)으로 등극하자 1577년(선조10)에 창빈(昌嬪)으로 추존되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1684년(숙종10)에 세운 것이다. 그녀의 자손이 와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후궁으로는 드물게 묘역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시대 후궁의 묘역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내외분께 참배하고, 김대중 대통령 묘소의 초소는 사람이 지키고 있고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는 창빈안씨 묘역이 있었다. 나의 속좁은 마음이겠으나 너무 김대중 대통령의 묘가 창빈안씨 묘역에 붙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 아래: 김대중 대통령 묘역, 묘지훼손 사건으로 초소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 대한민국초대대통령(大韓民國初代大統領) 우남이승만박사기념비(雩南李承晩博士記念碑)

우남 이승만박사는 1875년에 탄생하여 1965년 91세로 서거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시니 어려서부터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과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1899년부터 옥고를 치렀으며 1904년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가서 활약하시었다.

1905년부터 5년간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1945년 민족해방 후까지 그 법통을 지키며 해외에서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활동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었다.

해방후에는 미소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 간섭 속에서 민족을 영도하여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 자율적 정부 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로 1948년 총선거를 시행 제헌국회의장이 되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대통령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에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힘썼으며 1952년에 해양주권을 선언하여 국익을 수호 1953년에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강화하시었다. 1960년까지의 재임중 농지개혁 교육진흥과 민족문화창달 경제부흥과 산업육성 민주제도실시와 복지향상 등 국가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우리민족 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건의 대업을 이룩하시었다.

                                    위, 아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묘지를 올라가며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합장한 봉분

                                               1편은 여기서 끝냅니다. 2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