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산행 이야기: 오랜만에 내려 본 수유역1번 출구, 바로 출구 우측의 마을버스 강북01정류장을 헤맨후 버스가 도착 어느 노인분 버스기사의 안내에도 고집을 피우고 앞으로 내려 승차가 지체되고 화가난 버스기사 ‘늙으면 죽어야 해’라고 하는데 말 붙이기가 고약해<말이 길어질 것같아> 참았다. 버스는 노선을 이리저리 돌아 4•19묘역 삼거리를 지나 통일교육원이 종점인 곳에서 내린다.
위는 시작지점이며, 둘레길은 국립공원내로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순례길구간 아치문을 지나 둘레길과는 다른 선현들을 찾아 뵙는데 꽤나 시간이 지나 몇곳 만을 들리고 둘레길0.2km를 가는데 30여분이 소요된다. 낯익은 선현을 뒤로 한채 길옆의 묘소 안내를 지나쳐 보광사를 지나니 우측으로 보이는 4•19민주화 묘지가 들어오고 수많은 젊은 선배들의 영령에 고개 숙여 목례를 올린다.
제1구간 소나무숲길은 잠시후 솔밭근린공원이 아름답게 나타나 벤치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안내된 둘레길을 따르는데 이용문장군 묘소가 굳게 잠겨 있으며 우측으로 능선을 돌아 내려다보니 묘역을 잘 꾸며 놓았다.
※이용문(李龍文)장군은 6.25당시 수도 서울을 끝까지 사수한 유일한 군 지휘관으로 1951년 현리전투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 9사단을 선두에서 지휘해 성공적인 작전수행을 했으며, 이때 9사단 참모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53년 지리산공비토벌작전 중 지리산 운봉 상공에서 공중작전 지휘중 순국했다. 이런 인연은 경북 칠곡에 있던 묘소를 서울 수유리로 이장했으며,장군의 장남 이건개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시경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래 사진 좌측으로 묘가 있는데 이용문 장군의 요역이다.
야트막한 능선길을 따르다보니 만고강산 약수터를 지나 방학동의 동리옆을 지나 고개를 넘고 손병희선생 묘소의 굳게 잠긴 문(12시32분)을 지나 백운대탐방지원센터의 갈림길에서 우이천을 따라 큰길(해등로)을 건너 제20구간 왕실묘역길로 들어선다.
왕실묘역구간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에 왕족과 관계가 있는 유택이 관리가 부실한체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아주 관리가 되지 못하는 이름없는 유택은 오히려 정비하는 것이 방치하느니 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아마 조선왕조의 공동묘지 개념일 것으로 생각된다.그 중 연산군은 폭정에 묘자리도 부실할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몇군데를 더듬어 보고 구릉을 지나친다.
왕실묘역구간의 다소 관리가 되고 있는 묘들로 정경부인 전주최씨의 묘와 풍산홍씨의 묘이다.
왕실묘역 아치문이 또 나타나며 연산군 묘역 이정표가 나타나고,잠시후 길가 연산군 재실이 말끔이 정비되어 있고, 원당샘은 맑은 물을 토해내고 있으며 커다란 은행나무가 연산군 묘역을 지키는 듯 했다.조상에 대한 예인지 궁색하지만 관리는 그런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휘이 둘러 보았다.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지정된 방학동 은행나무는 높이24m,둘레9.6m,수령830년 된(지정일자 1968년2월26일)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다.이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하기 일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어 진화했다고 한다.
인근에 위치한 원당샘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 이름을 본떠 ‘원당샘’으로 명명되고, 수백년 동안 이곳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하여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다.이 우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주변의 연산군묘 및 은행나무와 연계하여 2011년에 자연친화적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방학로를 만나니 좌측으로는 우이령입구길이고 북측 2시방향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묘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으나 입구문은 굳게 잠기고 둘레길 따라 바로 옆에는 사천목씨(泗川睦氏)재실(齋室)이 있고,우측으로 휘어져 방학동 아치문이 있다.
정의공주의 묘를 다른 각도에서 담았슴.
※충정공(忠貞公)사천목씨(泗川睦氏)(1571~1652)는 인조 때 한성부 좌우윤을 지냈으며 백성을 위해 교화를 베풀고 청렴했던 인물로 사천목씨재실의 바로 옆에 목서흠의 묘역이 있으며, 묘역과 묘역 내 석물들은 조선후기 묘제 및 석물 제작양상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조경(趙絅)의 문장과 이정영(李正英)•조위명(趙威明) 등 당대 명문장가와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2에 소재하는 17세기 후반의 시설물이다.
능선을 넘어 아파트와 포도밭 사이를 지나고 신방학중학교 삼거리(13시38분)를 지나 계곡의 조그만 다리를 건너니 바가지약수터이다.낮은 구릉은 방학능선으로 쌍둥이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고 무수골에 도착했으나 먹거리가 빈약해 보인다.
둘레길은 위와같은 아파트 옆의 길도 있으며, 이정표는 헷갈리지 않도록 필요할 때 나타난다.
위와같은 아기자기한 길도 나타나고 아래의 지도를 잘 보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이다.
쌍둥이 전망대가 나무숲 사이로 보이고, 방학동길(제19구간길)을 표시한 아치도 가끔식 설치됨
윗무수골에 있는 도봉옛길(제18구간)으로 조금 더 가면 도봉산역이 나타날 기대를 해본다.
서둘러 제18구간 도봉옛길 아치문을 지나고 뱃속에서는 아우성인체 도봉탐방지원센터를 향해 내달려 도봉사이정표(←무수골1.1km,→도봉탐방지원센터0.6km)에서 힘을 얻고 도봉사,도봉산 능원사를 지나 낯익은 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난다.
5. 뒷일과 에필로그: 도봉역을 향하는 먹자골은 등산용품점의 홍수에 가리고 즐기는 먹거리는 쉽게 보이지를 않아 꽤 시간을 허비하고야 찾을 수 있었다.늦은 식사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 선택하고 맛있게 먹었다.(남도생선구이: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282-309/대표:김영삼 Tel:02-954-9865, H.P.010-4189-9865)
돌아오는 길은 피곤과 탁주 한병을 먹고 졸다가 보니 수원에 도착 집에 오니 18시가 되었다.
산악회를 다녀옴과 비슷한 산행을 즐겼던 오늘의 여정이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한 서울근교의 산자락을 다녀옴은 또다른 매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끄는 것 같았다. 이후 나머지 구간들도 즐기며 모두 답사하리란 생각을 해 보았다.
위는 연산군묘 앞에서, 아래는 쌍둥이 전망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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