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아내와 함께한 북한산둘레길-1/ 1편

아름답지만~ 2013. 2. 22. 22:57

 

광교산만을 찾던 우리에게 북한산둘레길은 참으로 오래전 북한산을 종주한 이후 오랜만의 북한산 길이 된다. 지난 2월16일 학교 동문들과 17•18구간을 걸어보며 예비답사의 감을 잡았으니 그리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계획을 세웠다.

둘레길 시작을 1,2,19,20으로 잡고 기본 구간과 전철과 버스 노선을 정리하여 먼저 버스로 사당동, 4호선 전철을 타고 수유역에서 내려 마을 버스로 통일교육원에서 시작되는 2구간 순례길구간을 향하고, 1구간인 소나무숲길을 거쳐 우이령 입구에서 20구간 왕실묘역길 그리고 19구간 방학동길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고 1호선 전철로 창동까지 가 4호선 전철로 갈때의 역순으로 돌아 왔다.

                                                          해등로를 건너느 곳의 둘레길 이정표

                       위와 아래 좌측부터 칼바위,병풍바위,주봉,뜀바위,신선대,자운봉과 만장봉은 포개져 보인다.

먼저 2구간인 순례길구간은 많은 선열들 묘소가 있는 곳으로 알고 예를 갖춘다는 아니 어쩌면 둘레길을 나서는 우리의 무사고를 빌어 본다는 의미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택하였으나, 돌아보며 이렇게 많은 분들의 안택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분들을 찾아 뵙는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해 몇분 만을 찾아 뵈었다.

                                                                    둘레길 구간의 풍경과 아내

                                               전망 좋은 곳에서 백운대와 인수봉(북한산)을 담아보고

1. 둘레길 요약: 이준열사 묘역입구(10시43분)-김병로선생 묘-이정표(↑솔밭공원2.3km,↓대동문2.0km,→둘레길탐방안내소<수유분소>0.3km/11시09분)-단주 유림선생묘역-이정표(←1.9km솔밭구간,←2.7km대동문,↓둘레길탐방지원센터<수유분소>0.4km)-이정표(↑김도연선생묘소0.3km,←둘레길탐방지원센터<수유분소>,→솔밭공원1.3km,→신숙묘소0.2km/11시28분)-4.19묘역(11시42분)-제1구간 소나무숲길(11시51분)-만고강산약수터(12시17분)-손병희선생묘소(12시32분)-제20구간 왕실묘역길(12시53분)-연산군묘역(13시14분)-제19구간방학동길 정의공주묘역(13시24분)-포도밭이정표(←2.7km무수골,↘정의공주묘0.4km/13시32분)-쌍둥이전망대(←0.8km무수골,→정의공주묘2.3km/14시20분)-제20구간 도봉옛길(←2.8km다락원,←1.3km도봉탐방지원센터→무수골0.4km/14시44분)-도봉산능원사(15시01분)-도봉탐방지원센터(15시05분)[산행시간 4시간22분]

                                                  둘레길에서 만나는 솔밭 근린공원과 작은 소나무쉼터

                                                         만고강산 약수터의 이정표와 둘레길 거리표

2. 선열들의 소개: ①일성(一醒)이준(李儁)열사(1858~1907)건국훈장대한민국장(1962)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 1896년 서재필 등과 조선독립협회를 조직, 1902년 만민공동회 주최로 내정개혁에 앞장서다가 이승만,이동녕 등 17명과 함께 투옥, 1906년 윤효정,장지연 등과 자강회를 조직했으며 만국청년회,헌정연구회,국민교육회 회장을 역임,보광학교와 서북흥학회,오성학교를 창설하여 청년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법의 수호신이란 별칭을 받기도 했으며 안창호와 비밀결사를 조직 활동,안중근이 설립한 진남포삼흥학교에서 「일심단결하여 완전독립하자」란 연제로 애국심 고취, 「한국혼 부활론」을 저술 민족정기 계도,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뜻을 이루지 못해 1907년7월14일 향년49세의 나이로 자결순국 하시었다.

②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선생(1887.12.15~1964.1.13) 건국훈장 독립장(1963)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법조인•정치가,일본에 유학중 [학지광]의 편집장 역임,1930년 신간회의 중앙편집장,8.15광복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 등을 지냈음.

③단주(旦洲) 유림(柳林)선생(894.5.23~1961.4.1)

경상북도 안동 출신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정치가 였으며 강제적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1929년 평양에서 최초의 아나키즘 전국 조직인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현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을 맡았으며 광복후에는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을 창당하였다.

④동암(東菴) 서상일(徐相日)선생(1887.7.9~1962.4.18)

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정치가였으며 1909년 나라의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하여 대동청년당을 만들어 활동하였고,1910년 일본에게 우리나라 통치권을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해 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이후,1915년 명절을 기리는 글짓기를 한다며 일본 경찰들을 속이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광복후에는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놓았다.

⑤현곡(玄谷)양일동(梁一東)선생(1912.12.30~1980.4.1)

전라북도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정치가였으며 중동학교를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연맹(1931)과 조선동흥노동연맹(1932)에 가입하여 각종 출판물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광복 후 제3•4•5대 민의원 및 제8•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⑥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선생(1879.7.10~1962.5.10)

경상북도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교육자로서 1905년 을사조약 체결반대와 매국5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려 옥살이를 하였으며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파리장서)을 알리는 활동을 주도하였고 1946년에는 성균관 대학을 설립하였다.

⑦상산(常山)김도연(金度演)선생(1894.6.16~1967.7.19)

경기도 김포 출신 독립운동가•정치가였으며 일본에서 1919년1월1일 비밀리에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고,2월8일 선생을 포함한 11명의 대표는 독립선언을 주도하여 옥살이를 하였다.1942년에는 일본이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려는 사건으로 인해 또다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입법의원과 제헌 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⑧강재(剛齋)신숙(申肅)선생(1885.12.29~1967.11.22)

경기도 가평 출신 독립운동가였으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배포를 하였다.3.1운동 직후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관여했고 활동을 지원하였다.1930년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⑨의암(義菴)손병희(孫秉熙)선생(1861.4.8~1922.5.1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충청북도 청원 출신 동학입교(1882),동학의 제3대 교조(1897),천도교로 개칭(1905.12.1)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1910)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복역한 후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⑩해공(海公)신익희(申翼熙)선생(1892.6.9~1956.5.5)

경기도 광주 출신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3.1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1945년2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 조직. 1945년12월 귀국해 정치공작대를 조직했으며 독립촉성회,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 국회의원(제1.2.3대),1954년 김성수,조병옥,윤보선,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 참여.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선거 유세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냈다.

3. 둘레길에서 만나는 곳: ①국립 4•19민주묘지(강북구 수유동 산9-1번지)

1960년4•19혁명 때의 희생 영령 199위를 모신 묘지로 1963년9월20일 약3000평으로 건립,한가운데 4•19혁명의 기상을 상징하는 높이 칠척의 탑주 일곱 개가 솟아 있고,주위에는 수호신상 및 각도를 달리한 20개의 만장이 조화를 이루었다. 1993년10월부터 성역화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묘지크기는 약 40000평으로 확장되었으며,유영봉안소,4•19탑,상징문,상징조형물로 조성되어 있다.

②연산군 묘역 사적 제362호

이곳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다.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중종(中宗)임금을 새로 추대하였다.(1506) 그 해에 연산군은 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7년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문인석(文人石),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묘역 아래쪽에는 의정궁주(義貞宮主)조씨(趙氏) 및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具文景)과 딸의 무덤이 있다.

③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과 정의공주(貞懿公主) 묘역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시대: 15세기 후반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번지 1호

이 묘역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1477)를 합장한 곳이다.이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신도비,묘표2기,상석2기,문인석2쌍,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1428년(세종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과 운문(雲紋)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1466년(세조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정인지(鄭麟趾)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貧世)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썻다.비는 이수(螭首),비신(碑身),귀부(龜趺)로 되어 있다.

                                  다녀온 선현들을 담다보니 2편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