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2일의 경주여행(慶州旅行)-2

아름답지만~ 2013. 4. 4. 06:18

 

이곳에서 작은 암산으로 휘돌아 내려서니 그곳에도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가는 길이 있으나 출입을 통제하는 표시와 줄이 쳐 있다. 축대 밑까지 접근해 보지만 덩그러니 안내판 만이 반기는 듯 했다. 이곳을 지키는 듯 바로 아래에는 상선암이 자리하고 있으며,이곳에도 선각보살입상의 바위가 누워 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 磨崖釋迦如來座像)<경북 유형문화재 제158호>

남산의 북쪽의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중턱에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으며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고 앉아 있다.

                    위의 들판 너머에 망산이 보이고, 마애여래좌상을 담고져 통제구역을 넘었으나 넘어진 바위가 자제를 요구

상선암에서는 가파른 길을 목재데크로 안전한 길을 만들어 편하게 내려와 이정표가 있는(←삼릉주차장1.25km,↑석불좌상40m,→금오봉1.35km/상선암0.35km) 곳에서 석불좌상 쪽으로 계곡을 건너가 새로이 단장한 석불좌상을 보고 옆의 깊지않은 석굴도 들여다 보고, 안내된 선각여래좌상을 향해 다녀왔다. 남산의 구석구석에 수많은 바위들은 신라인들 눈에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아주 좋은 재료인 듯했다.

                       상선암 옆에 누워있는 선각여래좌상의 흔적을 지나면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석불좌상은 보수되어 완벽하게 보이고,조금 옆으로 간 곳에는 선각여래좌상이 있다.

계곡을 다시 건너 내려가는 길옆 반듯한 바위가 인공을 가미한 듯 반듯이 놓여있고 정상적인 선각여래좌상 입구를 지나니 잠시후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이 두 개의 바위에 선각되어 있다.이곳 바위틈에는 봄의 전령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군데군데 설치된 이정표는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겠으며 이정표(←삼릉주차장0.75km,→금오봉1.85km/상선암0.85km,↑마애관음보살상50m/석조여래좌상)의 석조여래좌상과 마애관음보살상을 보고, 삼릉쪽의 입구에는 흩어졌던 석물들이 한 곳에 모여있으며 소나무가 뒤틀여 자란 숲을 뒤로하니 삼릉의 모습이 들어온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의 전체와 바로 옆의 바위돌과 어우러진 소나무

                             선각육존불은 두개의 바위에 각인되어 위는 우측의 삼존불,아래는 좌측의 삼존불을 담았다.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제21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

이곳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제53대 신덕왕(神德王),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높이 5.4m,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박경휘)을 추대하였다.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능의 크기는 밑둘레 61

m,높이 5.8m,지름 18m이다.두 차례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조사되어 그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중국 후당(後唐)과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높이 4.5m,지름 16m이다.

                                         위는 석조여래좌상<두부가 손상되어 어색하다>,아래는 마애관음보살상

                            배동의 삼릉의 모습과 석비<좌측부터 아달라왕릉,효공왕릉 그리고 경명왕릉이다>

삼릉에서 남쪽으로 경애왕릉이 자리잡고 있으며 두곳을 싸잡아 소나무숲이 아름다우며 큰길(35번국도)에서 시내방향으로 향하다가 주차장 맞은 편의 의자에서 간식을 먹고 출발,얼마가지 않은 곳에 삼불사로 들어가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을 둘러보고 나왔다.

                                                  삼릉 구역의 솔밭에서 키톤치드의 향음을 즐기며 걸었고

              35번 국도변 삼릉구역에는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라 안내판도 있고,삼불사로 향하다가 이름모를 열매도 본다.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

신라 제55대 경애왕(재위924~927)을 모신 곳으로 밑둘레 43m,지름 12m,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한다. 제53대 신덕왕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삼릉에서 경애왕릉으로 가는 다리를 지나면 경애왕릉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제63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65-1>

여기 세 돌부처는 경주 남산 서쪽 자락의 삼불사(三佛寺)에 인접해 있다.이곳 선방사(禪房寺)터 부근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제작시기는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위는 삼불사의 모습,아래는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학생들이 역사 공부와 지루하지 않은 이동을 위해서일까? 시골길 같은 길을 따라간 곳의 태진지는 무료한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는 곳이다.우리는 시기가 맞지않아 볼 수 없었지만 조그만 저수지 주변은 야생화를 구역별로 재배하는 안내판이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니 곧 지마왕릉(祗摩王陵)이다.

                                              태진지의 모습과 여름에는 많은 꽃들을 재배하는 안내도가 있다.

※지마왕(재위112~134)릉은 남산의 서쪽 아래에 있다.지마왕은 파사왕(婆娑王)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왜구,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능은 밑둘레 38m,높이 3.4m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이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태진지를 지나며 다시한번 담았고, 지마왕릉의 단촐한 모습도 담았다.

지마왕릉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포석정이 있다. 옛 선현들의 조각술과 여흥은 감탄할만 하겠으나 요런 곳에서의 여흥은 왠지 제대로 즐겼을까 의심스럽지만 예술적인 감각은 높이 사야할 일이다. 1999년 아내와 왔을 때에 비해서 주변 정비나 조경등은 많이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포석정(鮑石亭)지<사적 제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은 신라왕실의 별궁으로,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마치 전복같이 생긴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화강석으로 만든 수로(水路)의 길이는 약22m이다.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을 잘 정비해 놓은 듯 했으며,포석정 경내의 산수유 꽃이 만개했다.

포석정에서 아주머니의 조언으로 큰길을 따라 20여분을 가니 안내판(나정•양산재•백련사•배씨 시조사당•일성왕릉)이 있는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 나정(蘿井)이다.안내책자의 나정과 눈앞의 나정은 너무 생각했던 것과 상이하다. 울타리만 있을 뿐 넓은 공터,주변의 멋진 소나무가 없었으면 그나마의 위안도 아니었을 것이다.개발의 끝에 복원을 계획해서인지 유허비도 한 귀퉁이에 비석과 덮개돌이 따로 놀고 있다.

                                                                     나정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

※경주 나정(慶州 蘿井)<사적 제245호,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00-1>은 오릉(五陵)의 동남쪽 소나무 숲이 무성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우물터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기원전 69년 어느날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말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알이 있었다.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이곳에는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으며,조선 순조(純祖) 3년(1803)의 시조왕의 내력을 담은 유허비가 있다.

               나정은 복원계획만 세우고 정비가 덜 되어 조선 순조 때의 유허비도 비석과 덮개돌이 따로 놀고 있다.

울타리 너머 양산재인 듯 하지만 이곳에서 큰길로 나서 택시로 동궁과 월지(旧名 안압지,雁鴨池)에 내려 들어가니 전의 초라했던 경내가 건물도 주변도 많이 정비되고 복원되어 월지를 한바퀴 휘도는데 야간 조명이 시작되어 한결 운치를 더한다.

                                   안압지<동궁과 월지>에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라 조명이 시작되었다.

시내로 향하다가 식당(화림정 한정식: 경주시 원화로 163-13)에서 비싸지 않은 저녁을 먹고 어두워진 거리를 이동 첨성대를 둘러보고 나와 계림(鷄林)에 들렸다가 큰 봉분으로 향하며 대릉원으로 착각해 서성이다가 어둠속에서 시외터미널로 이동해 무척이나 요란한 불빛을 피해 서림모텔(경주시 노서동 171-7)에 들었다.

               첨성대를 들리고 그 옆에 있는 계림도 들여다 보고 황남리 고분군을 서성이다가 첫날의 여정을 마무리.

                       첫날의 여정을 2편까지 마무리 합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