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2일의 경주여행(慶州旅行)-3

아름답지만~ 2013. 4. 5. 20:24

 

4.시티투어: 모텔에서 안내책자를 들고 가 내일의 여정을 구상하던 중 시티투어를 발견했으나 시간이 늦어 내일 알아보리라 마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일어나 시내 정찰 차 나가니 시티투어 회사가 터미널 근처에서 눈에 띄어 창문의 상품을 숙지하고 모텔로 돌아가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 나와 근처의 밥집(근자현식당/숙소와 가깝다.)에 들려 가장 싸게 아침식사를 한 후 천마관광으로 갔다. 대금을 지불하고 신경주역에서 출발한 버스에 승차한 후 보문관광단지의 세 곳과 불국사 근처 등에서 회원들을 태우고(41명) 불국사 경내로 들어서는데 전에 왔었던 기억이 새로운 정원과 조금은 다듬은 정원수와 풍경으로 다가온다.불국사의 정원에서 간단한 설명을 한 후 대웅전 경내로 이동한다.

                        불국사 일주문은 요금징수원이 버티고 서 있고,거길 통과하면 저민치 천왕문이 버티고 서 있다.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국보 제23호>는 대웅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등의 옛기록에 의하면 위쪽이 청운교,아래쪽이 백운교이다.계단을 다리(橋)라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한 것이다.청운교는 16단,백운교는 18단이며,계단 경사면이 45⁰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다.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백운교를 지나면 자운문이 나오는 계단으로 국보이고,그곳을 향하는 인파들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국보 제22호>는 극락전 구역으로 오르는 석조계단으로,아래쪽 연화교는 10단,위쪽의 칠보교는 8단이다.청운교 및 백운교 보다 규모는 작으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계단은 45⁰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보이며,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곡석으로 되어 있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연화교 및 칠보교 그리고 안양문을 옆에서 정면에서 담고

※범영루(泛影樓)는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하면 이 자리에 있던 원래의 건물은 우경루(右經樓)로,좌경루(左經樓)와 함께 경전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인다.현재의 건물은 1969~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때 다시 세운 것으로,내부에 법고(法鼓)가 놓여 있다.범영루 건물을 받치고 있는 수미산 헝태의 돌기둥은 8세기 중엽 불국사가 건립되었을 때 세워진 원래의 건물을 받치고 있던 돌기둥으로 돌을 목조건축 부재인 첨자 모양으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다.

                                              범영루의 모습과 안양문에서 내려다 본 불국사 앞 정원의 모습

대웅전 앞 동서로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으나 석가탑은 해체 수리중으로 가건물 속에서 유리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대웅전 앞의 석등은 가이드의 설명대로 키높이로 석등의 창을 통해서 석가모니불을 뵐 수 있었으나 디카로는 잘 안나온다.

※다보탑(多寶塔)<국보 제20호>은 통일신라의 목조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조합한 독창적인 형태의 탑으로,높이 10.3m이다.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있다.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위는 불국사 경내에 있는 다보탑이고,아래는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복제품인데 복제품의 돌사자는 네 마리이다.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국보 제21호>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 높이 10.63m이다.동쪽 탑인 다보탑과 마주 보고 있으며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한다.이 탑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경내의 삼층석탑은 수리중이라 경주국립박물관의 복제품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대웅전(大雄殿)<보물 제1744호,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1>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대웅(大雄)’,즉 ‘큰 영웅’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한다.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처음 세워졌고,임진왜란 중인 1593년 건물의 석조 기단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탓다.1765년 남아있던 기단 위에 앞면,옆면 각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재건되어,통일신라 때의 기단과 조선 18세기의 건물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대웅전 뒤에는 무설전(無設殿)이 있으며,2009년 5월24일에 봉안했다는 태국불상과 김교각 스님(신라 성덕대왕의 아들로 출가,794년 수행의 자세로 입적,등신불로 중국 구화산 화성사에 모셔짐)의 등상(等像)을 모시고 있다.그 뒤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관음전(觀音殿),비로전(毘盧殿)과 사리탑(舍利塔) 및 극락전(極樂殿)<현판 뒤에 복돼지를 숨기고 있다.>을 보고 서편의 축대를 따라 정원쪽으로 나오며 선조들이 쌓은 석축의 튼튼함과 축조 방법의 설명을 들은 후 각자 촬영시간을 가진 후 떠난다.

                                                         무설전의 모습과 관음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에서

                                                                      관음전의 모습과 비로전의 모습

                                                위는 불국사 사리탑이고,아래는 극락전의 현판 뒤에 돼지가 보인다.

다음은 보문단지를 향하는 중간의 민속공예촌의 역사과학관에서 선조들의 지혜와 모형도로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솔깃하게 들리던지 시티투어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특히 일행중 초등생이 수첩을 들고 메모하며 해설자나 가이드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명 깊은 장면이었던 것 같았다.

                                                                             불국사의 흔적을 담아보고

석굴암의 모형도와 환기 및 배수시설 등의 연구,다른 석굴들의 모형들,첨성대의 모형과 신라시대의 관측예상 등,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설명을 보면서, 이후의 경주관광은 이곳에서 예비 지식을 익힌 후에 실물을 보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문단지를 지나서 분황사에 들려서 모전석탑을 둘러보고 그 외의 화쟁국사비부,석정,보광전 등을 둘러 보았다.보광전에서는 제를 올리고 있어 제가 끝난후 구경했다.

                     위는 첨성대의 해부도(?)로 모형을 만들었고,아래는 석굴암의 해부도를 꽤 여러개 만든 중의 한컷이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나왔다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복제품과 분황사 입구의 문

※분황사(芬黃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 일대>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분황사 창건직후에는 당대(當代)의 명승(名僧) 자장율사(慈裝律師: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주석(駐錫)하였다.

고려 고종(高宗)25년(1238)의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의 임진왜란(1592)•정유재란(1597)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 광해군 원년(1609)에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을 주조해 사역을 지키고 있다. 경내(境內)에는 신라 석탑중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模塼石塔,국보 제30호)•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화쟁국사비부:경북유형문화재 제97호)•구황동 당간지주(九黃洞 幢竿支柱:경북유형문화재 제192호)•신라 호국룡(新羅 護國龍)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石井:경북문화재자료 제9호)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 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부의 모습을 담았다.

                                                                모전석탑의 감실을 두곳을 담았다.

점심은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의 황실(Tel:054-743-4064)에서 팀별로 주문,계산한 후 김유신장군 묘역으로 가 흥무문(興武門)을 거쳐 들어가 신라의 어느 왕보다 화려한 봉분과 보호석을 둘러보고 릉(陵)과 묘(墓)가 어우러진 비석을 보았다.

                             점심식사를 한 음식점과 김유신장군 묘역입구(후에 추증된 흥무대왕이라 흥무문인가?)

※김유신 묘(金庾信 墓)는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에 있다.김유신 장군(595~673)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군사를 지휘하였다.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爵)을 받았고,김유신 장군 사후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능은 밑둘레 50m,지름 18m,높이 5.3m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다.

            김유신장군의 당당한 묘역과 십이지신상의 모습 중 올해의 계사년 뱀띠를 올렸고,

                                     김유신장군 묘비명이 재미 있다. 물을 머금으니 능이 묘로 변한다.

                                                  다음 4편에서 다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