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2일의 경주여행(慶州旅行)-4

아름답지만~ 2013. 4. 6. 20:54

 

다음으로 들린 황남리 고분군의 일부인 대릉원에 들려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을 구경하였다.총(塚)이란 누구의 묘 또는 능인지를 모르는 추정된 왕의 무덤에 붙는 이름으로 조그만 연못과 수많은 봉분들이 있으며,천마총은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대릉원 구역은 무덤들의 집단처인데 작은 연못가의 목련은 봄을 맞는 꽃봉우리가 터지고 있다.

※경주 황남리 고분군(慶州 皇南里 古墳群)<사적 제40호,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53>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 안에 있다.원형으로 쌓아올린 30기의 무덤 중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冢)과 황남대총(皇南大塚)등이 있다.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게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하여 무덤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동서길이 80m,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북쪽 무덤은 여자로 부부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남대총의 쌍무덤과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천마총의 입구

                                                    이웃의 무덤 중의 한곳이지만 부장자의 이름은 모른다.

버스는 35번국도로 교충교를 건너 좌회전해 남천을 좌측에 끼고 달리며 최씨고택을 지나며 월정교가 복원중인체로 시선을 끌고 있다.

※월정교는 교동과 인왕동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의 누교(樓橋)로 길이 66m,너비 9m,높이 8m규모로 2014년을 목표로 복원중이다.

                                              <블로그 아름다운 여유님의 사진을 인용해 올립니다.>

잠시후 경주국립박물관에 도착해 입장했다.입구를 들어서며 맨처음 만난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성덕대왕신종을 보면서 역사와 범종의 구조에 대한 식견을 높이고 박물관 본관은 수리중이라 뜰안의 다보탑,석가탑의 모형물을 지나 임시로 전시한 선조들의 유물관에 들렸다.

                         위는 사자,공작돌 무늬돌인데 왜 만들었는지 모르는 유물,아래는 동궁과 월지(안압지)의 모형도

                   위는 용장골에서 출토된 약사불로 1975년 복원한 모습,아래는 찰주본기의 펼쳐진 모습을 담았다.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崇福寺 雙龜趺)<높이 0.77m,너비 1.8m,통일신라 9~10세기>

두 마리의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 터에 있던 것이다.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비문은 최치원이 지었던 것이었다.이러한 쌍거북은 경주 배동의 창림사 터와 경주 암곡동의 무장사 터에서도 볼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국보 제29호,통일신라 771년,높이 3,658m,무게 18,908km±2km>

이 종은 원래 성덕대왕(재위 702~737)의 원찰(願刹:왕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찰)이었던 봉덕사(奉德寺)에 있다가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영묘사(靈廟寺,경주읍성 동문 밖,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그런데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이제 전시용으로 변했다. 종의 밑에 홈을 메우고 목침을 받쳤으니 제 임무는 끝난것이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덕분에 많은 유물들이 잘 보존되고 박물관의 전시물이 많아사자•공작 무늬돌,용장골 출토 약사불,감은사 사리갖춤,장창골 출토 미륵삼존불,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왕정골 출토 석조불입상,이차돈 순교비,고선사터 삼층석탑 등을 보고 마지막 코스인 첨성대에 들려 기울어진 모습과 교통통제를 듣고 우리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른 차를 이용해 신경주역으로 갔다.

   위는 미륵삼존불로 남산의 장창곡에서 발견되어 옮긴 것이고,아래는 금동약사불입상으로 백률사에 있던 것을 옮긴 것

※감은사 사리갖춤(感恩寺 舍利莊嚴具)<경주 감은사터 서삼층석탑 출토,보물366호,682년 무렵>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재위 661~681)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재위681~692)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의 동서 양탑에 넣었던 사리갖춤 가운데 가장 바깥쪽을 감싼 외함(外函)이다.서탑의 사리갖춤은 1959년에,동탑의 사리갖춤은 1996년에 각각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지붕돌 윗면에 뚫린 장방형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감은사 사리갖춤의 그 오래전의 정교한 모습

※이차돈 순교비(異次頓 殉敎碑)<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출토,통일신라 817년>

370년대 불교를 공인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법흥왕(法興王,재위514~540)14년(527)이 돼서야 불교를 공인하였다.「삼국유사」「원종흥법(願宗興法)염촉멸신(厭觸滅身)」조(條)에는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朴厭觸,506~527)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는데,박염촉이 바로 이차돈이다.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그 머리는 소금강산(金剛山)에 떨어졌으며,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그리고 헌덕왕(憲德王,재위809~826)9년(817)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를 세웠다고 한다.그 비석이 바로 백률사에 있던 이차돈 순교비이다.

                                                 위는 이차돈 순교비,아래는 경주 남산 왕정골 절터에 있던 석조불입상

※고선사터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국보 제38호,경주 고선사터 통일신라 686년 이전>

이 탑이 있던 고선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617~686)가 머물렀던 절이다.1975년 고선사터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여러 문화재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위는 고선사터 삼층석탑,아래는 분황사의 원래의 규모를 축소 복제해 놓았다.

5.에필로그: 모처럼의 신라의 고도를 알뜰하게 다녀본 것 같았다.남산의 다른 계곡도 욕심을 내볼 수 있을 터이고,박물관에서 본 또다른 사적(史蹟)도 욕심이 생기는게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번 여정에 함께 하신 류국장 댁네의 묵묵히 따라준데 대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역사를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세대들은 눈으로 보고 배우면 한결 쏙쏙 들어갈 터인데,역사가 홀대받는다는게 아쉬웁다.모든 재능과 창작은 선조들의 지혜로움에서 출발하는게 아닐는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며 1000년의 고도 여행을 다듬어 보았다.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으며 정리해 본다. 

                            역사의 숨결을 가슴깊이 느끼려는 여행을 끝까지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