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인문학 역사탐방(2013년 5월29일/수원문화원)-2

아름답지만~ 2013. 7. 9. 05:55

 

6.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사적 13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311>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면에서 전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강화도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강화도 지석묘로 잘 알려진 이 고인돌은 이른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라고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인돌이다. 해발 약 30m높이의 능선 위에 세워진 이 고인돌은 흙으로 바닥을 수십층 다진 뒤 받침돌(지석)을 좌우에 세우고 안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사체를 넣은 다음, 판석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으나 두 끝의 마감돌은 없어진 상태여서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 같지만, 제단 기능의 고인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규모는 덮개돌 긴 축의 길이가 6.4m, 너비 5.23m, 두께 1.34m에 전체높이 2.4m이다.

 

                                                                 같은 지석묘를 방향을 바꿔가며 담아 보았고, 지석만 남은 것을 아래에 담고~~

 

7. 광성보(廣城堡) 주변의 기록들

①광성보(廣城堡)<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833>

조선 1658년(효종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의총이 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안해루를 점령한체 설명을 듣고(안쪽에서 담고), 안쪽 뒤로는 바다인 염해가 있다.

②쌍충비(雙忠碑)<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 순절비인데 폭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③신미의총(辛未義塚)<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곳은 조선 고종8년(1871)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되기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④출입통제 안내문:본 구간에 식재되어 있는 수목은 지형상 뿌리가 지면에 노출된 상태로 수년간 성장한 수목으로 돌출된 뿌리에 복토시 성장의 장애 및 고사가 우려되어 부득이 원형대로 보존 관리하고 있는 실정으로 수목의 보존을 위하여 출입을 통제하오니 관광객 및 이용객께서는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광성보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의 꽃을 두장 실었는데 이름을 아시는 분 댓글 요망합니다.

8. 정족산의 기록물들

①삼랑성(三郞城)<사적 제130호,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 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현수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宗海樓)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안해루 통로에서 비를 피하며 역사적인 해설에 귀 기우리는 일행, 정족산 사고지로 올라가며 만난 수령 600년생 은행나무

②정족산 가궐지<향토유적 제1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635>

고려 고종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白承賢)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假闕)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郎將)으로 있을 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했을 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단에 제사를 하면 친조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전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가궐지로 추정되는 지역<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정표도 가까이 있다.

③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임진왜란(1592) 전에 실록(實錄)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 등 3개의 외사고(外史庫)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39년(1606) 4월 복인(復印)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며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 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4년(1653)11월 사각(史閣)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 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移安)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강화문화권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장서각은 굳게 잠겨 있으며, 경원보각은 열린체이다.

④전등사 약사전(傳燈寺 藥師殿)<보물 제179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635>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13년(1876)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자 지붕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우물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⑤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보물 제393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懷州) 숭명사(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놓은 것을 광족 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⑥전등사 대조루<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635>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전등사 대조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다시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위는 대조루 밑 통로에서 본 대웅전, 아래는 대조루가 연등에 쌓여 있는 모습

⑦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보물 제178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635>

조선 광해군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극락조,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⑧전등사 윤장대(傳燈寺 輪藏臺)

윤장대란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이에 전등사에서는 사찰을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희망하는 소언이 하루속히 성취하도록 하기 위하여 발원문을 작성한 후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도록 성물을 조성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전등사 주지 합장

                              불두화와 매우 유사하지만 불두화의 늘어지는 가지보다 이 꽃의 가지는 뻣뻣해 다른 나무인가?

9. 에필로그: 역사를 모르는 민족의 장래는 암담할 뿐이다. 선조가 있으므로서 오늘의 우리가 있으며, 선조들의 잘못되었던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강화는 역사적으로 고조선부터 기록이 나오고 고려시대 부터는 대몽항쟁, 삼별초의 굴욕적인 몽고와의 협상에 반발하는 등 많은 희생과 손실이 함께하는 곳으로 각인되고 있고, 조선시대는 쇄국과 개방의 틈새에서 많은 희생을 치룬 역사적으로도 중요했던 곳이다.

요지음 정치권의 논쟁은 사색당쟁으로 파국으로 치닫던 임진왜란의 시기와 무엇이 다른지 곱씹어 볼 일이다. 적전의 사분오열, 젊은 층에 확산되고 있는 친북성향의 진보, 나이먹은 세대에게는 굶주리며 일궈온 조국의 미래가 근심스러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선조들의 조국애와 예지를 다시한번 곱씹어보는 기회는 좀더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탐방’이란 이름보다 ‘애국의 여행’이란 명제로 확산 보급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더웠던 날씨, 간간이 뿌리는 빗줄기에서 역사의 한자락을 열심히 엊고져 노력했던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와같은 프로그램에 틈틈이 참석해 선열들이 일구어 낸 조국의 한 귀퉁이에서 미래를 위한 미력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게 노력해 보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끝까지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