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인문학 역사탐방(2013년 5월29일/수원문화원)-1

아름답지만~ 2013. 7. 6. 11:36

 

장안구민회관을 다닌 덕으로 이런 기회를 얻게되어 두 가족 네식구가 참여한 역사기행은 그동안 관광 위주에서 배움을 위한 여행으로 변경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부터 국방의 중요 지대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며, 고려의 대몽항쟁으로 오랜 기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삼별초의 난으로 배운 삼별초 시발점이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왕족이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와야 했고, 외세의 침입을 저지하는 전초기지로서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뒤따른 지역이다.

1. 다녀온 길: 8시50분까지 장안구청앞에 집합하라는 문자를 받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으나 9시에 출발해야 하는 버스가 오지않아 따지는 사람도 있고, 운영진은 양해를 구하며 오늘의 회원들 틈을 다니고 9시가 지나서 버스가 나타나고 서둘러 승차해 출발한다./9시11분-1국도-의왕요금소-309지방도-학의분기점-100고속도-김포요금소-48국도-강화 갑곶돈대/10시43분~11시15분-48국도-용흥궁/11시25분~11시42분-대한성공회/11시47분~12시05분-걸어서-왕자정묵밥/12시15분~12시40분-걸어서-강화고려궁지/12시45분~13시15분-48국도-강화고인돌/13시30분~13시45분-48국도<되돌아>-84•5•64지방도-광성보/14시10분~14시45분-84•13지방도-삼랑성/15시~16시-13•84•64•84지방도-초지대교-352•305지방도-계양나들목-100고속도-의왕요금소-1국도-장안구청 앞/18시02분

2. 갑곶돈대의 시설물들

①갑곶돈대(甲串墩臺)<사적 제306호,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100>

강화도는 서울의 주요 방어기지인 동시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왕실이 피난 하는 제일의 후보지였다. 병자호란 이후로는 청(淸)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과 진,보,돈 등의 군사 시설을 강화하였는데 숙종 5년(1679)에 갑곶돈을 비롯하여 염주돈,제승돈,망해돈을 이 곶에 소속시키고 갑곶포대를 설치하여 대포 8문을 두었다. 갑곶의 성문인 진해루가 동문 역할을 하였다. 이 돈대는 1977년에 복 원한 것이다.

②대포(大砲; 구경 100mm,길이 215cm,중량 1,800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 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 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③소포(小砲; 구경 84mm,길이 119cm,중량 171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 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 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④불랑기(佛狼機; 구경 26mm,길이 82cm,중량 38kg)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으로서 포 1문에 다섯 개에서 아홉 개의 자포(子砲)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⑤강화비석군

이 비석군은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판관,경력,군수 등의 영세 불망비 및 선정비이며,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삼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 적비 등 총 67기이다. 자연보호의 일환인 금표는 숙종 29년(1703)강화유수부(고 려궁지)앞과 여러 지방에 세웠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졌다.

이 금표는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표석이며 삼 충사적비는 인조 14년(16360청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를 침입하여 강화도를 공 략하자 월곶진(연미정)에서 적과 역전분투 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장렬하게 전사 한 삼충신(강흥업,구원일,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호국정신의 얼 이 담긴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당초 이들 비석들은 1965년 강화대교 착공시 그 주변에 있었던 것을 용정리 1086번지에 이전 하였다가 비석군 정비사업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⑥금표(禁表)

1733년 세워진 강화 유수부의 경고문으로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백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팔십대라고 쓰여 있어 조상들의 자연보 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⑦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

인조 14년(1636)삼충신(황선신,구원일,강흥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황선신:조선중기의 무신으로 강화부중군(정2품)재직시 인조 14년(1636)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공략하자 월곶진 연미정에서 적을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장 열하게 전사하였다.

구원일: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불은면 고능리 출신이며 강화 좌부천총(정3품)재직시 황선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강흥업:조선중기의 무신으로 강화읍 옥림리 출신이며 강화우부천총(정3품)재직시 황선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대교 가까이에 위치한 갑곶돈대에서는 김포시의 문수산의 문수산성과 함께 방어진지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3. 용흥궁(龍興宮;인천광역시 강화읍 동문안길 21번길 16-1)

①용흥궁<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

조선 철종(哲宗,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였던 잠저(潛邸)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 금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외전 1동,별전 1동 등이다.

철종의 생가로 소개되지만 이곳은 짧은 생애를 마감한 일명 강화도령이 천진난만하게 시골생활을 했던 철종이 살던 집터에 왕에 걸맞게 집을 짓고 아름답게 미화한 곳이지만 씁쓸한 마음이 든다.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내전에서 설명에 귀기우리고, 철종의 옛집터 비석으로 들어서는 문

                                                        사랑채의 모습과 초라한 용흥궁 배치도의 모습

4.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22)

①대한성공회강화성당(大韓聖公會江華聖堂;사적 제424호)

본 성당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 베드로와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 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길이 10칸)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물양식은 한국 전통야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 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마치 절집같은 분위를 띄우고 있으며 범종까지 있어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사찰분위기로 영국의 성공회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한 노력과 대민 봉사는 얼마나 했을까가 느껴지며 좋은 자리를 택함도 성찰의 도를 짐작케 한다. 

5. 고려궁지(高麗宮址)의 기록들

①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사적 제133호,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1232년(고려고종 19)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이곳에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 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이 행차 시 머무는 행궁을 건립하였고 유수 부 동헌과 이방청,외규장각(2003년 복원),강화동종 등만 남아 있다.

               식당에서 바라본 고려궁지의 일부와 외규장각이 보이고,식당에서 고려궁지를 향하다가 만나는 은행나무 고목

②고려궁지의 연혁

1232 고려수도 강화로 천도, 1234 고려 강화궁궐 건립, 1270 개경으로 환도, 궁궐과 성곽이 파괴됨, 1622 봉선전 건립(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1627 강화유수 부로 승격, 1631 조선행궁 건립, 1636~1637 병자호란(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일부 건물이 불에 탐), 1638 유수부 동헌 개축, 1654 이방청 건 립, 1695 장녕전 건립(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1713 만녕전 건립(조선 국왕의 영 정 봉안), 1781~1782 외규장각 건립(왕립 도서관), 1783 이방청 중수, 1866 병 인양요(프랑스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많은 건 물이 불에 탐), 1964 고려궁지 사적 지정(제133호), 1977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 원정화사업, 2003 외규장각 복원

③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 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 골과의 화친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 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고려궁지의 발굴지의 모습으로 위는 장녕전 추정지, 아래는 문헌상 1칸인 척천정 추정지

④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년 (광해군 14)에 봉선전(奉先殿: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 되었고, 1631년(인조 9)에는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 유수 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년(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숙종 21) 장녕전(長寧殿), 1713년(숙종 39) 만녕전(萬寧殿)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 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 6)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 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을 불태웠다.

1964년 고려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 되어 현재는 유수부,동헌,이방청,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유수부 동헌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과 아래는 고려궁지 발굴터에서 내려다 본 외규장각의 뒷모습

⑤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1638년(인 조 16)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1769년(영조 45)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 觀)이라 하였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이 쓴 것이다. 건물 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 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으로 정비되었다.

⑥외규장각(外奎章閣):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住紙)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 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⑦강화동종(江華銅鍾):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후 1711년(숙종37)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있고, 그 아래에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城門)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종각(鐘閣)은 당시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복원정비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1999년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동종이 보관된 종각과 아래는 고려궁지에서 본 점심먹은집과 앞쪽의 회화나무

                                                         다음편에 계속하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