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2일 전주한옥마을 <초등 동창네와>-1

아름답지만~ 2014. 11. 4. 15:44

아내들의 모임에서 모인 돈으로 12일을 다녀오자는 언질이 있어 계획을 세우고 전주로 여행지를 정하며, 일자를 협의해 확정 짓고 열차표를 예매하며 실행을 준비했다. 이제껏 전주는 하룻밤을 묵거나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자료를 찾으면서 또다른 전주의 매력 속으로 푹 빠져드는 기분으로 다닐 곳과 명승지를 체크하기에 이르렀다.

전주한옥촌은 을사늑약(1905) 이후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양곡수송을 위한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남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이 서문 근처에서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해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한옥촌이다. 296,330708(한옥 543, 비한옥 165)으로 인구 2,202(1,097/1,105)와 세대수 995이다.

관광안내소는 한옥마을 내에 세곳이 있으며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완산구 남노송동 100-9/전화 063-282-1330>, 경기전 관광안내소<완산구 풍남동 102/전화 281-2891>, 오목대 관광안내소<완산구 풍남동 315-11/전화 282-3301>이다.

                                                                    철 모르는 동백은 늦가을 피어났고, 치명자산 오르다 본 앞의 한옥마을

                                                                       전주를 자랑하는 글과 경기전에서 본 아침의 헬리콤이 촬영을 하는 모양

1. 다녀온 날: 2014.10.15.~16 (수요일,목요일)

2. 참가자들: 김광남네, 김복근네, 박해병네, 장도득네 8

3. 갈 때: 새마을호(ITX);수원(0907)-천안(0937)-서대전(1036)-논산(1058)-익산(1121~24)-전주(1136)[ 2시간29분 소요]

시내버스;전주역 앞 관광안내소(1142)-길건너 CU편의점(1150)-예술회관(1212)

                                                                                          ITX(새마을호) 안내판

                                                                   전주역사와 광장 앞의 관광안내소는 친절하게 한옥마을 버스번호까지

                                                                   전주역 앞의 관광안내소, 풍패지관을 가기위해 예술회관에서 하차

4. 첫날관광: 풍패지관(豊沛之館/전주객사)을 돌아보고 나와 사거리 맞은 편의 풍년제과에 들려 수제 초코파이 한박스를 구입 한 개씩 나누고 빵 가방을 들고 팔달로를 걷는다.

풍패지관(豊沛之館)<전주객사(全州客舍)> <보물 제583/ 완산구 중앙동 31-1>

전주를 방문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였다. 전주객사는 원래 외삼문,중삼문, 내삼문과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지금은 내삼문 안쪽에 있던 본관건물과 수직사(守直舍) 건물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본관 양편으로 동서 익헌(翼軒)이 좌우대칭으로 있었는데 도로를 내면서 헐어버린 동익헌을 지금은 약간 짧게 복원되었다. 양 익헌은 모두 대청마루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관에는 궐()자가 새겨진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조정에서 내려오는 관리는 이곳에서 임금의 교지를 전하였으며, 외국의 사신이 오면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에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려 배례를 올려,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동헌보다 격이 높은 곳이었다.

전주객사에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썻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93년 송강 정철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익산 출신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耈)는 북경의 객사에서 중국인 청년 주지번과 인연을 맺었다. 주지번은 2년 뒤 명나라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고 1606년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되어, 송영구와의 인연을 귀히 여기고 자신이 묵었던 전주객사의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팔달로를 10여분 걸으니 우측으로 풍남문(豐南門)이 안쪽으로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란 현판을 걸고 있으며 밖으로는 풍남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옹성이 있으나 닫힌 채여서 밖에서만 볼 뿐이었다.

풍남문(豐南門)<보물 제308>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 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의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 버렸고, 영조 44(1768)에 전라감사 홍낙인(洪樂仁)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이란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누각 윗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도심에 자리한 단아한 성문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태조로로 동쪽을 향해 경기전 못미친 좌측 길(전동성당길)로 들어서니 종로회관에 많은 학생들과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점심을 먹을 수 있냐는 물음에 자리를 안내해 전주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나왔다.

먼저 전동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혼잡스러움을 가중시킨 가운데 피에타의 성모상을 지나 돌아보고 나오려니 좌측 모서리에 한국 최초의 순교터 석비가 있다.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사적288호 완산구 태조로 51(전동)>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시켰던 풍남문 밖에 지어진 성당이다. 프랑스 신부인 위돌박이 설계감독을 하였고 1914년 완성되었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지은 건물은 겉모습이 서울의 명동성당과 비슷하며,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조선왕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기전. 입구에서 검표를 하지만 쓱 얼굴을 보더니 무사통과를 허락한다. 정문을 들어서니 홍예문을 설치하는지 공사차량과 함께 있어 우회해 먼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을 둘러보고 문닫인 조경묘(肇慶廟)를 지나 어진박물관에 들려 수많은 왕들의 어진을 알현(?)한 후 부속건물<마청,서재,제기고,어정,용실,전사청,조병청 등>을 지나 태조로를 동쪽으로 향해 가다가 오목대로 향하는 계단길(105)을 올라가 몇 개의 계단(199)을 오르니 오목대이다.

경기전(慶基殿) <사적339/ 완산구 풍남동3102>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12(1412)에 태조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24(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6(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익랑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경기전은 20110728일 고시로 전주경기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경기전 작은 문을 나가면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가 있는데, 원래 선조11(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10(1734)에 다시 고쳐 세웠다고 한다.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전주사고(全州史庫)1439(세종21)에 설치되어 실록과 국가중요서적을 보관하였고, 현존건물은 1991년 신축되고 내부에는 역사전시물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시되어 있다.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과 어진봉안 유물들을 보관하기위해 건립된 국내 유일의 어진(왕의 초상) 전문 박물관이다.

            경기전과 태조 이성계의 어진, 경기전 앞의 무쇠솥 같은 것은 드므라는 건데 화재에 대비한 방화수로 좌우 6개이다.

                                                       위는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아래는 전주사고

                                                                             세종대왕과 영조의 어진

                                                                        정조대왕과 고종황제의 어진

조경묘(肇慶廟)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 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位牌,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도성을 쌓고 고치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영조 47(1771)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오목대(梧木臺)이목대(梨木臺) <시도기념물 16 / 완산구 교동 산 1-3>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이며, 고종이 직접 쓴 비문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祉)”를 통해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6(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駐畢遺祉)”라는 비문을 고종 광무 4(1900)에 세웠다.

                                              위의 사진들은 오목대에 관하고, 아래는 이목대의 것들임

                                          1부의 전주한옥마을 여행은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