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어둠이 깔려가고 한정식을 찾아보니 입이 딱 벌어지는 가격이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니 문닫힌 강암서예관(剛菴書藝館)과 학인당(學忍堂)을 지나 ‘교동떡갈비’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을 가보니 으억 무궁화 다섯 개, 잠자리를 찾다가 소리울호스텔<전주시 완산구 팔달로 144-4/전화 063-232-3992>과 통화, 택시로 찾아드니 우리 스타일에는 딱인 곳이었다.
5. 둘째 날 관광: 숙소의 창문을 열어보니 경기전의 서편에 있는 호스텔이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와 밥집을 찾아 나서 전동성달길로 북쪽을 향하니 콩나물국밥집들이 몇군데 있다. 그 중 미리 확인했던 ‘콩나루콩나물국밥집’을 점찍고 서문을 개방한 경기전으로 들어간다. 전날 보지 못한 곳을 간다며 인적이 끊어진 조경묘를 지나고 예종대왕 태실 및 비를 다녀서 통화해 일행을 불러내 콩나물국밥을 먹는데 비가 세차게 온다. 숙소로 돌아 갈 걱정도 잠시, 잦아든 빗줄기 속에 숙소로 와 짐정리를 하고 나서니 비는 그친 후이다.
다시 학인당으로 가니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출입이 되지 않는데 어제 그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해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학인당(學忍堂)은 전주한옥마을의 대표적인 한옥으로 1908년 지어져 1976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520평 대지에 사랑채와 안채,별당채,뒷채,헛간,쌀광 등 일곱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지만, 건축될 당시엔 대지만해도 2000평에 이르는 아흔아홉 간짜리 대 저택이었다. 특히 조선왕조 붕괴 이후 궁궐의 양식이 민간주택에 적용된 대표적 사례로 지금도 한옥 연구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본채인 ‘학인당’은 2층 가까운 높이의 천장에 내부가 판소리를 공연할 수 있도록 설계된 특수한 구조의 한옥으로, 임방울•박녹주•김연수•박초월•김소희 같은 당대의 명장들이 수시로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100년 역사와 대 저택으로서의 명성답게, 해방공간에서는 백범선생 등 정부요인의 숙소로, 한국전쟁 때는 공산당도당위원장이 점거해 사용했던 곳으로 역사의 부침을 함께해 왔다.
향교길 조금 진행하다가 우측 전주천으로 들어서 남천교로 가 다리 한 켠의 청연루와 남천교의 역사적인 일들을 훑어본 후 다시 되돌아 강암서예관을 향한다.
※남천교(南川橋)는 조선후기 다섯 무지개다리로 불렸으며 승암산과 한벽당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였다. 일명 다리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겼다해서 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또 다리윗 부분에 용이 조각되어 오룡교(五龍橋)라고도 하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닮았다해서 안경다리(眼鏡橋)라 했으며,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아 승화산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남천교는 영조 29년(1753,계유)에 유실되고, 정조 14년(1790,경술) 복구작업을 시작, 1791년12월 완공했다.
현재의 남천교는 전주시가 옛 고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복원하여 2009년 새롭게 가설된 것이다.
※청연루(晴燃樓)는 한벽루 절벽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면서 하얀 포말을 이루는 장관을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寒壁晴燃)이란 문귀로 찬미하였으며, 여기에서 유래해 청연루(晴煙樓)로 이름 지어졌다.
청연루는 무지개 다리 형태의 교각에다 한옥 누각을 올린 올린 독특한 양식으로 정면 9칸, 측면 2칸의 평면에 팔짝지붕 모양의 전통한옥 목조 누각으로 건축, 주변 한옥마을과 전주천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져 전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남천교에서 바라 본 치명자산 산중턱의 흰색은 동고사의 부처석상, 아래는 청연루의 전경
남천교의 개건비는 1791년 석교 완성 후 1794년에 건립되었다.원래 이 비는 한벽당 우측 천변 둑에 있었으나 1950년대 후반 방치된 것을 전주교육대학교 교정에 옮겨놓았다 한다. 이후 남천교가 새롭게 건립되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이다.
강암서예관(剛菴書藝館)은 주변을 정리하는 이른 시간에 들렸다. 일행이 들어서자 한 분이 나서서 선생의 일생과 서예관이 서게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하시고, 생전의 글들과 역대 대통령의 글, 그 외의 다른 명필가의 글들도 함께 설명하며 둘러보고 나왔다.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은 1913년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107에서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의 3남 1녀중 셋째로 출생했으며, 선친의 강학소(요교정사)에서 공부해 한학을 깨우쳤다. 16세에 이도남(李道南)과 결혼 후 장인인 고재 이병은으로부터 학문과 서도를 사사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으로 1965년 이주, 1967년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연묵회를 조직 서예의 틀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작품과 땅을 전주시에 기부할 의사를 밝히면서 서예관 설립을 추진해 5년간 준비기간을 갖고 1995년에 강남서예관을 개관(약 264평)하게 되었으며,
선생은 1999년 서거하셨고, 소장품은 1162점으로 분기마다 교체 전시하고 09시개관~18시에 문을 닫는다.
선생의 슬하에는 4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하철씨는 전주시장과 부지사를 지냈으며, 차남 하경씨는 서예가이며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중이고, 3남 하춘씨는 소설가이며 고려대교수 4남 하진씨는 행자부민간협력과장이고 2녀도 서예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花姸兒女姿,零落一何速,竹比君子德,掎掎寒更綠.~꽃의 고운 모습은 마치 아녀자의 자태와 같아서 한 대 고왔다가도 쉬이 시들어버린다네,대나무는 군자의 덕에 비할 만하니,대나무 잎사귀의 부드럽고 더부룩한 모습은 날씨가 추울수록 더 푸르기 때문이라네,~/아래의 천자문은 당신의 80세에 쓰신 글이라니 대단하신 분이다.
선생이 생전에 쓰신 글들을 전시하고 있다.위의 글들은 불국사,일지암,금오산향일암, 아래는 내장산내장사, 토암산석굴암
호남고속도로서 전주로 들어오면서 있는 문에 쓰인 호남제일문, 적토성산 강암선생 79세 여름에 쓰셨단다.
아래의 글은 강암서예관을 개관하는 기념의 글로 黑蘭 莖受露而得低,香從風而自遠<줄기엔 이슬이 맺혀 고개를 숙였지만,향기는 바람을 따라 멀리 멀리 퍼져가네>
다음으로는 한지길로 들어서 한지공예를 하는 몇 곳을 들려보고 필요한 물품도 산 후, 승광재를 찾아들어 조선왕조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을 둘러 보았다.
한지공예전시관과 한지로 만든 조명등
전주한지 공동판매장, 종이의 제조과정을 3장 담고
※승광재(承光齋) <완산구 풍남동 3가 42-10>; 조선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머물고 있으며, 전통 궁중 한식과 궁중 다례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빛을 계승한다는 승광재는 전주시청 소유의 한옥건물이다.
조선 26대 고종의 왕자 의친왕의 11번째 왕자인 이석은 1941년 종로의 사동궁에서 태어났으며, 이때 의친왕은 이미 62세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눈적도 없이 경동중•고등학교, 외국어대 서반아학과에 입학했다. 세상이 바뀌고 전쟁이 터지고 4.19를 거치면서 들어선 군사정권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나오던 왕가 생활보조금마저 끊어져 버렸다. 곤궁한 나날 속에서 음악다방 DJ, 미8군 가수생활, 워커힐 쇼 사회 및 가수, 1966년 군예대로 월남참전했으나 차량사고로 부상해 귀국했다.
여러 번의 이혼, 10.26사태 후 LA에 식품가게(강도를 13번이나 당함), 10년뒤 귀국 생활고와 마음의 병으로 9번이나 자살을 시도, 통도사 3년 등 불우한 생활의 연속이었으나 기자가 알아보고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으며, 이후 전주시의 배려로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한지길로 전통술박물관을 들린후 전주한옥마을 석비에서 기념촬영 후 어진길을 거쳐 전주최씨종대(全州崔氏宗垈) 석비와 은행나무길 석비가 있는 곳의 설빙이란 곳에서 팥빙수를 먹고 동학혁명기념관을 들려 최제우 교주등의 행적과 혁명의 당위성 등을 본 후 전주역으로 향하는 길에 점심을 먹는다고 전주시청 근처로 향했다.
은행나무길 최씨종대 석비와 은행나무가 있는 설빙이 팥빙수를 먹은 집,아래는 전주시청 후면
※은행나무길; 전주에는 향교와 풍남동 길목에 수령이 500년은 족히 됨직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슬지 않는 나무로 관직에 진출할 유생들이 부정에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향교에 심었다고 한다. 풍남동 은행나무는 조선의 개국공신 월당 최담 선생이 귀향한 후 후진양성을 위해 학당을 세우면서 전주 최씨 종대 뜰 안에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남동의 은행나무는 조선왕조 500년간 갖은 풍상을 겪으며 조선왕조의 흥망을 지켜온 산역사이며 전주가 호남 유학의 본향임을 상징한다. 그래서 전주 사람들은 정겹고 유서깊은 이름 ‘은행나무 골목’을 사랑한다.
시청 근처의 음식점을 찾아가 갈비탕을 먹고,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로 전주역에 들어서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기차시간을 채운다.
6. 돌아올 때: 무궁화;전주<원래는 15시28분임>(15시33분)-삼례(15시41분)-익산(15시52분)-강경(16시12분)-논산(16시21분)-서대전(16시48분)-조치원(17시20분)-천안(17시42분)-평택(17시57분)-수원(18시17분) [ 2시간44분 소요]
급행화물열차가 우리의 정시에 들어왔고, 수원역의 대합실
아래는 은행나무길의 한 컷
7.마무리: 수원역에서 시내버스로 팔달문으로 이동 ‘다림메밀’에서 대구탕으로 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다소 힘이 든 여행일 수도 있으나 역사를 뒤늦게 공부하는 기회와 선조들의 얼이 묻어난 곳을 다닐 수 있었던 건 건강의 재충전이라는 명제에 훌륭하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 여행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여행 <광교산우회 가을여행>-2 (0) | 2014.12.02 |
---|---|
강화도 여행 <광교산우회 가을여행>-1 (0) | 2014.12.02 |
1박2일 전주한옥마을 <초등 동창네와>-2 (0) | 2014.11.05 |
1박2일 전주한옥마을 <초등 동창네와>-1 (0) | 2014.11.04 |
수의과 동기생 모임-2 (0) | 201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