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1박2일 전주한옥마을 <초등 동창네와>-2

아름답지만~ 2014. 11. 5. 10:47

이곳에서 다시 계단을 내려서고 기린대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조금 내려선 언덕편 좌편에 이목대의 비각과 안내판을 본 후 지만벽화마을을 지나고 한벽당에서 15분여 휴식을 취한 후 치명자산 성지를 향하다가 식수를 각 1병씩 사 나눠 마신다.

한벽당(寒碧堂)<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완산구 교동 115>은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깍아 세운 누각으로, 옛사람들은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꼽았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선생이 71세 때인 태조 8(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전주천변을 거슬러 가다가 삼거리를 지나 좌측으로 성지 가는 길이며 우리는 십자가의 길(1~14)로 고행의 계단길을 오르며(300m), 묵묵히 뒤따르는 일행을 유도했다. 오르는 중간중간에 사랑꽃이 반겨주며, 철모르고 피어난 동백꽃도 보고, 고도를 높여 지나온 한옥마을을 내려다 본다. 잠시 오름이 이어지고 기념성당이 나타나며, 얼마전 방한하셨던 교황사진이 실물크기로 서 있다. 다시 계단을 두 구비돌아 오르니 유항검과 그의 가족무덤이 있다.

                                           치명자산 이정표를 조금만 가면 1~14처까지의 짧은 길이지만 오름길 십자가의 길을 오르게 된다.

                                                         성당 입구가 한적하고 얼마전 방한하셨던 교황의 사진이 실물 크기로~

치명자산(致命者山)성지 및 천주교순교자 묘 <완산구 대성동 산11-1>

이곳 치명자산은 세계종교 역사에 진주(眞珠)라 불리는 동정부부 순교자(유요한,이루갈다)와 호남의 첫 신자요 사도로 존경받는 그의 부친 유항검(柳恒檢:아우구스띠노)7인의 고결한 합장묘가 모셔진 순교자의 언덕(몽마르뜨)이며 축복의 성산이다. 예수평화상 뒤 왼쪽 바위 벼랑을 따라 설치된 골고타 십자가의 길로 기도하며 오르면 300m 산정에 순교자의 묘와 기념성당이 있다.

유항검과 그의 가족 7인의 순교자 무덤<지방기념물 제68>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출신인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전주지방의 대부호였으며,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받고 천주교에 입교,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모시게 되었다. 18010917일 현재의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유항검의 장남 유종철(柳鍾喆/요한, 22)과 차남 유문철(요한, 18)18011009일 전주 옥에서 순교, 같은 해 1228일 전주 숲정이에서는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맏며느리 이순이(李順伊/루갈다), 그리고 조카 유중성(마태오)이 순교하였다. 특히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1797(정조21)에 혼인한 동정부부(童貞夫婦) 순교자이다. 일곱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교우들이 제남리에 가매장, 19140419일 전동성당 보루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안장했다.

                                                           십자가의 길에는 모두를 사랑하라는 뜻인지 사랑꽃이 즐비하고,동백은 아무때나 폼내고

 

               1~14처중의 11처에 있는 십자가와 이정표(우리가 오른 십자가의 길에서 성당으로 가다)

          순교자 무덤이 있는 곳은 성당의 옥상과 연결된 너른 터 한켠에 무수한 열매의 나무(?)와 좌측의 순교자묘, 더멀리 십자가

혼자서 한옥마을에서 보이던 예수상을 보겠다고 험난한 바위를 돌아 올라보지만 바위가 날카롭고 길도 개척해야 해 되돌아 내려와 다른 길로 내려 오다가 보니 동고사의 한편에 하얀 부처상이 계신다. 여기를 예수상으로 착각하고 정상으로 올랐었구나 쓴 웃음을 지어 본다.

  바로 아래의 큰길이 기린대로,하천이 전주천, 하천따라 우측부위가 남천교와 청연루 그 우측이 한옥마을이다. 한문실력이 2/3만 ㄲㄲ

                                       길도 개척하며 오르다가 만난 바위는 오를수록 날카로워진다.

          순교자 묘소 위에 보이던 십자가이며, 동고사의 부처님 석불을 착각하고 산정을 오르려 객기를 부렸다.

동고사(東固寺)는 신라 헌강왕 2(876)에 도선(道先)스님이 창건했으며, 전주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고사라 칭했다 한다. 동고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헌종 10(1844)에 허주(許舟)스님이 다시 짓고, 그 후 영담(暎潭)스님이 1946년에 대웅전 등을 새로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신라 경순왕의 둘째 왕자가 범공(梵空)이란 이름의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동고사를 지나며 임도는 이어져 10여분 후 일광암 입구를 지나 우측으로 들어가는 동고산성과 견훤왕궁지 석비를 지나치고 5분여 후 군경묘지에 다다른다.

동고산성(東固山城)<시도기념물 44 / 완산구 대성동 산 25>: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 승암산에 있는 산성으로,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산꼭대기를 둘러 성벽을 쌓았다. 승암산의 절벽에 의지하여 서북쪽으로 수구(水口)를 뚫었으며, 남북으로는 날개모양의 익성을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성 전체의 둘레는 1,588.3m이고, 북쪽 익성의 길이는 112m, 남쪽 익성의 길이는 123m이다. 동서축의 길이는 314m, 남북 축의 길이는 256m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4m이다. 현재 동남문터와 배수구문, 건물터, 우물터 시설이 성 내부에 남아 있으며, ‘중방(中方)’, ‘()’자를 새긴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동고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편 산성을 남고산성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의 궁성터라는 말이 전해왔다. 백제 재건의 기치를 든 견훤왕은 신라 효공왕 4(900)에 완산주를 점령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해 37년간 존속했다. 1990년 발굴로 전면 22(84.4m), 측면 3(16.1m) 66(1,359) 넓이의 건물터가 조사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굴 조사된 단일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며, 이곳이 견훤왕의 궁성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군경묘지(軍警墓地)는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합동군경묘지를 설치하였다. 묘역에 충혼불멸이란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로 1949912일 설치하였으며, 그 후 19550301일 동일 묘역안에 충혼불멸탑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이 탑은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하여 전투중 전사 순직한 군인과 경찰들의 유해를 모신 낙수정 군경묘지에 세운 충혼탑으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이들의 공훈을 후세에 길이 전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195531일에 건립하고, 국가보훈처에서는 본 탑을 2003915일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군경묘지에 안장된 분들의 묘비를 몇 훑어보고 그들의 숭고했던 정신에 고개 숙여 예를 갖추고 한옥마을을 향하며 다시한번 동고사의 부처상을 뒤돌아 보았다. 전주향교를 가는 길에 박진 효자비를 지나서 전주향교에 다다른다.

박진 효자비(朴晉 孝子碑)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5/ 2009.10.30. 지정>: 이 비석은 1398(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경종 4)에 증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순조 5)에 후손 필성(必晟)이 지은 전주부(全州府) 효자(孝子)박진정려기(朴晉旌閭記)’가 걸려 있다. 박진의 자()는 내신(乃臣)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완산지에 박진은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시중을 들면서,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예법에 따라 장사(葬事)와 제사를 모셨으며,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전주향교는 조선시대의 학교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으며 300년 이상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전주향교(全州鄕校)<사적 379/완산구 교동 26-3>: 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이 향교는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당시에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사적 제339) 근처에 있었으나,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전주성 서쪽 황화대 아래로 옮겼다 한다. 지금의 위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관찰사 장만이 옮긴 것이다. 현재 이 향교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전북도유형문화재 제7>을 비롯해 동무(東廡), 서무(西廡), 계성사(啓聖祠), 학생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明倫堂)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위의 은행나무는 수령 350년 나무높이는 30m 나무둘레는 3.5m이며 아래는 수령 400년 나무높이는 30m 나무둘레는 10.4m이다

                                        2편을 여기서 마무리하고 3편으로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