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강화도 여행 <광교산우회 가을여행>-1

아름답지만~ 2014. 12. 2. 13:14

강화여행은 작년 5월말 역사탐방으로 다녀왔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또다른 매력을 찾고져 함께 하기로 했으나, 새벽 빗줄기가 저으기 실망스럽지만 약속은 지키리라 하고 아내와 함께 매향교로 가게 되었으며, 출발시간을 기다리는동안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강화는 지리적으로 수많은 사건들을 지내온 선조들의 고단한 삶이 짙게 배어있는 현장으로서 그날의 여정을 정리하여 또다른 공부를 해본다.

1. 다녀온 날: 2014112일 첫째 주 일요일 08

2. 가는 길: 오늘 따라 뒤에 앉아보니 기록이 위험스럽지만 많은 노하우가 써먹을 때가 있었다. 매향교<0801>-43국도-동수원나들목<0808>-501고속도-올림픽대로<0834>-김포한강로-78국지도-전류리<0910>포구 경유-48국도<0920>-강화대교-강화고려인삼센터<0928~46> [가는 길 1시간27] 

3. 강화군 관광: 고려인삼센터<~0946>-48국도-강화풍물시장<0956~1035>-84국지도-광성보<1050~1135>-해안도로-덕진진<1141~12>-길상면 초지리 수원호금진호식당<1210~1333>-86지방도-전등사<1347~1454>-356지방도-대명항<1525~1618>

4. 오는 길: 대명항-356지방도-48국도-김포나들목<1713>-100고속도(서울외곽고속도)-조남분기점-1550고속도-북수원나들목<1809>-1국도-한일아파트<1815>

[ 1시간57분 소요] 

5. 관광지별: 풍물시장; 강화를 몇 번이나 왔었지만 처음으로 풍물시장을 방문해 옛 우리의 장터를 보는 느낌으로 돌아 다녔고, 빨래비누와 순무를 사 가지고 오는 바람에 한일아파트에서 내렸는데 비닐포대가 찟어져 집에까지 오느라 고생 좀 했다. 

광성보; 지난 해 역사기행을 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이 조국을 수호하다가 산화한 현장을 몇 곳 돌아봤으나 이번에는 더욱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주차장 옆 감나무에 무수히 달린 많은 감을 보았으며, 해안루를 거쳐 쌍충비각을 지나치고 손돌목돈대를 휘이 한바퀴 돌고 용두돈대로 가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본 후 나오다가 신미순의총을 들린다. 그리고 해안루 옆의 광성돈대를 들여다본 후 떠났다.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1658(효종9)에 설치한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숙종5)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을 기리기 위한 신미의총이 있다.

쌍충비(雙忠碑)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 비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손돌목 돈대(孫乭項 墩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武器庫)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광성포대(廣城砲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123>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 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1874)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 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4,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영호 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용두돈대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지키던 천연 요새(要塞)로서 손돌목 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이다. 고종 8(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 부르게 되었다. 병인(丙寅)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치열한 포격전(砲擊戰)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戰迹地)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정화기념비의 글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많은 유적 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 보면 칠백년 풍우가 스쳐 간 고려 때 궁궐 옛터, 고종 19(서기1232)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라 일컫고, 원종 11(서기1270)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 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의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 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서기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을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고 다시 그 뒤 고종 3(병인 서기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산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신미 서기1871)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들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했으나 워낙 무력불급으로 어재연 장군 등 수백 명 용사들이 순국했었다. 4년이 지나 고종 12(을해 서기1875) 일본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말로 민족 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유서 깊은 역사적 옛터에 세월이 흘러 성곽은 허물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의 전적지를 돌아보시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이어받는 국민교육의 정신적 도장이 될 곳이라 정성들여 복원 정화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므로 그 뜻을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이 일을 마치니 이 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서 가슴에 국난극복의 결의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197710월 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손돌목 (손돌의 한숨, 손돌의 추위)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1627)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 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이 길 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따라 뒤짚일 것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 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10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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