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24시마트에서 야채죽을 데워서 먹은 터라 시장끼가 돌아 식당가를 돌아 찾다가 ‘금오산 한우촌’ (구미시 금오산상가길 39-10)에서 갈비살을 맛있게 먹고 나왔다.
②금오지올레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나름의 경치가 있는 듯해 금오랜드 입구를 지나 애국지사 박희광선생 동상이 있는 곳에서 물가에 데크길을 따라 걷는다.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연보: ◽본명: 朴喜光(박희광), 일명: 相萬(상만),
◽1901년 2월15일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출생, ◽1916년 만주 봉천성 청원현 남성자학교 졸업,
◽18세 때 大韓 統義府(대한 통의부) 특공대원 입대, ◽1919~1924년 상해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滿洲(만주)지역을 무대로 다양한 항일 독립전쟁 전개, ◽1924년 7월22일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투척 ◽1924년 일본인 요정 금정관에 침입 군자금 획득 중 일본군경과 총격전 끝에 피체, ◽1924년 대련 관동청 지방법원 1심 사형, 뤼순(旅順)고등법원 2심 무기형 언도, ◽1924~1943년 중국 뤼순(旅順)형무소에서 20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 서훈, ◽1970년 1월22일 70세를 일기로 작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부인 류문기 여사와 합장
여름이면 인근의 많은 인파가 몰리는 듯 보트장도 있고 쉴곳도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데크길 따라 둑방에 다다르고 둑방 밑에 널따란 주차장이 금오산의 제2주차장이다. 이곳에서 택시를 이용해 박정희대통령 생가를 찾는다.
물속의 나무가 주산지가 생각나고, 뒤돌아 본 주왕산이 햇볕에 반사된다.
위는 수위에 따라 움직이는 부교로 설치되고, 금오지 둑은 올레길로 박희광선생 동상까지 이어진다.
배수장을 정자처럼 꾸몄고, 다시 금오산을 쳐다본다.
③박정희대통령 생가는 주변공원화계획도가 처음 우리를 맞이한다. 2005년12월에 계획된 공원화는 커다란 동상과 입구만이 만들어진 썰렁한 분위기이다. 다행스러운 건 택시기사 말에 의하면 공사가 얼마나 진행될지는 몰라도 몇 대의 덤프트럭이 흙을 정리하고 있어, 뒤늦었지만 다행한 일이었다. 우선 생가터로 들어 두 분의 실물대 사진에서 폼을 잡아보고 안으로 드니 어릴적 공부하던 방에 책상과 책꽂이 및 호롱불이 놓여있다.
※박대통령께서는 이 방에서 1917년11월14일 탄생하시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까지 공부하시던 방이다. 방에는 책상, 책꽂이, 호롱불이 있다.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와 확인 등 사진은 눈에 익은 것들로 옛날을 회상케하는 것들이 많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들은바, 병점뜰 경지정리할 때 아버님은 경지정리 위원장을 맡으셨고, 어느날 새벽 현장에 계실 때 누군가 등뒤를 건드리며 ‘수고 많으십니다’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박정희대통령께서 그곳에 계시더란 얘기를 하신 기억을 하고 있다. 당신이 조국근대화와 잘 살아보세를 기치로 한 혁명정부에서 나태해지기 쉬운 부하직원들의 솔선수범과 현장확인에 갓 결혼한 나를 감동 시켰던 일들은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잊지 못하는 것도 지금의 발전된 조국 때문일 것이다.
동상을 둘러보고 돌아올 채비를 하며 이곳이 빨리 다듬어져 2005년에 계획된 공원화가 완성되기를 빌어보며, 달려온 택시를 타고 구미역으로 향한다. 열차시간을 한참 남겨논 시간, 저녁을 먹고 가고자 식당을 다녀와 잠시 기다려 프래트홈으로 들어간다.
박정희대통령 동상의 손에 쥔 종이의 글: 이 세대에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평생에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선진열강과 같이 잘사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에서 (1964. 8. 3)
6) 에피로그: 나이들면 감상적이 된다는 얘기가 내나이에 그리 변하는 걸 느끼며, 그래도 우리는 아내와 내가 건강하게 산을 오를 수 있다는데 감사하고 있다. 억척스러웠던 산행을 다소 자제하며 우리의 수준에 맞을만한 산을 그것도 가급적 찾지 못했던 산으로 하는 것도 이제 우리의 체력을 시험하지 말고 오랫동안 산행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겠으나, 학창시절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4.19학생의거, 5.16혁명과 한일외교 반대시위등 수많은 사건속에서 우리는 성장하였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가진게 없어서 불편했지만 이웃과 친척간 괴리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잘 살게된 지금은 어떤가? 부모 자식간에도 부드럽지 못한 일들이 상재하고, 이웃과 관계,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등 너무도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이 혼신을 다했던 박정희대통령의 부강한 조국의 부수적으로 따라붙은 병폐가 되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각성하여야 할 문제들이다. 정부도 사회적인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괴리를 시정하는데 한치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금오산도립공원 상가지역의 시민헌장탑과 채미정 입구에 있는 야은 길재선생의 시비
금오산을 오르면서 뒤돌아 본 금오지와 구미시가 아름답게 조명된다.
본 표지석은 금오산 정상 반환전인 2014년 9월 이전까지 있었던 옛 정상석으로 실제 정상은 해발 10m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약사암의 범종각으로 건너는 출렁다리(굳게 잠겨있다), 금오산 산자락의 바위벽
금오산호텔로 연결되는 출렁다리와 채미정중수비문
金烏山(금오산)은 南篙山(남고산)이라하여 海州(해주) 北篙山(북고산)과 더불어 三韓(삼한)의 靈山(영산)으로 이름이 높다. 蒼空(창공)에 드높은 氣像(기상)은 實(실)로 毅然(의연)한데 奇巖絶壁(기암절벽) 아득히 부서지는 瀑布(폭포)는 깊고 맑은 精氣(정기)를 더욱 旺盛(왕성)케 한다. 滔滔(도도)히 흐르는 洛東江(낙동강) 물줄기는 南域(남역)을 열어 기름진 들역이 豊盛(풍성)하다. 일찍이 高麗(고려) 忠臣(충신) 忠節公(충절공) 吉再先生(길재선생)이 이 山(산)에 隱居(은거)하시어 곧은 節義(절의)를 지켰으니 後世(후세)의 崇仰(숭앙)을 받아 마땅하다. 冶隱(야은) 吉再先生(길재선생)은 高麗(고려) 三隱(삼은)의 한사람으로 1386年(년)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成均館(성균관)博士(박사)를 거쳐 門下注書(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老母(노모)를 奉養(봉양)하기 위하여 辭職(사직)하고 故鄕(고향)에 돌아왔다. 그 後(후) 朝鮮(조선)의 새 王朝(왕조)가 建國(건국)하여 太常博士(태상박사)를 내렸으나 두 王朝(왕조)를 섬길수 없다고 拒絶(거절)하고 善山(선산)에서 後進敎育(후진교육)에 힘썻으니 그의 學統(학통)은 金叔滋(김숙자),金宗道(김종도),金宏弼(김굉필),趙光祖(조광조)에 이어내렸다. 이곳은 일찍이 吉再先生(길재선생)이 푸른 대는 松竹(송죽)의 節義(절의)가 굳고 시냇물은 밤낮으로 慾心(욕심)을 씻는구나 마음속 밝고 맑아 허튼일 없으니 이로부터 道(도)의 단맛을 깊이 알리라 하시던 實(실)로 由緖(유서) 깊은 곳이요. 1768年(년) 善山(선산) 선비들이 이 터에 採薇亭(채미정)을 建立(건립)하여 先生(선생)의 學問(학문)과 忠節(충절)을 기리던 곳이다. 그러나 오랜 歲月(세월)속에 建物(건물)이 頹落(퇴락)하고 坍墻(담장)이 허무러져 그 面貌(면모)가 초라하더니 1977年(년) 九月(구월) 朴正熙大統領(박정희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文化公報部(문화공보부)는 境內(경내)建物(건물)을 補修(보수)하고 石橋(석교)를 다시놓아 境域(경역)을 幽顯(유현)하게 淨化(정화)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金烏山(금오산) 山情(산정)의 情趣(정취)를 느끼면서 吉再先生(길재선생)의 맑고 곧은 忠節(충절)을 배우게 될 것이다. 一九七八年 六月(1978년 6월)
表面題字(표면제자) 大統領(대통령) 朴正熙(박정희), 글 李孝祥(이효상), 글씨 金忠顯(김충현)
끝까지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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