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성보 용두돈대를 나오며 사진과 설명이 쓰여있어 적어 본다.
① 점령당한 후 손돌목돈대와 조선군의 시체들(1871. 6.11)
신미양요 기간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서 미군 측에서는 맥키(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의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다.
② 손돌목 돈대의 외부 모습
무너진 성벽과 파괴된 포자, 힘없이 내려진 깃발, 즐비한 조선군 전사자의 모습, 미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해 파괴되고 점령당한 조선군 마지막 보루의 처참한 모습이다.
③ 용두돈대의 원경
1871년 6월 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시작한 돈대, 6월11일 손돌목 돈대의 함락과 더불어 하단에 있는 광성돈대와 해협으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용두돈대도 곧 미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함락 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군사시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각종 군기와 대포들을 전리품으로 노획한 다음 6월12일 오전 소속 함정을 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였다.
※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은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 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廣城堡)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肅宗) 5년(1679)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일만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砲) 3문(門)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③덕진진;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남장포대를 멀직히 본 후 되돌아 나왔다.
※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水營)에 속한 진이었다. 덕진돈,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돈대와 포대는 숙종 5년(1679)에 설치했다. 병인양요 때(1866)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격파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 덕진진 주변의 역사적인 사진과 설명
① 덕진돈대를 강제 점령한(1871) 미국군사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② 덕진돈대를 강제점령한 후 성조기를 계양하는 모습
③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 5명 (염하강 건너편으로 김포의 덕포진 일대와 손돌의 묘가 있는 언덕이 바라보인다.)
※ 남장포대(南障砲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남장포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이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덕진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성첩(城堞)과 시설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었는데, 1977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④전등사; 정족산성의 안에 소재하며, 정족산사고도 있어 역사학에서는 필수 코스인지라 보다 많은 설명과 돌아본 곳이다. 사고지를 몇이서만 다녀왔다.
※ 전등사 안내도의 표시들
a; 동문,b; 양헌수비,c; 대조루,d; 강설당,e; 대웅전,f; 향로전,g; 약사전,h; 명부전,i; 극락암,j;범종,k; 고려가궐지,l; 템플스테이,m; 화장실,n; 죽림다원,o; 윤장대,p; 정족사고,q; 남문,r; 삼성각,s; 북문,t; 서문,u;취향당
위는 수령 600년, 나무높이 25m, 나무둘레 5m인 은행나무, 아래는 수령 570년,나무높이 23m, 나무둘레 4m인 은행나무
위는 전등사 입구의 대조루, 아래는 전등사 경내의 모습
대웅보전과 양 모서리에 있는 원숭이상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함이다.
※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130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 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 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임진왜란(1592)전에 실록(實錄)을 보관하였던 사고(史庫)는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全州史庫)만이 화(禍)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壬亂)의 병화(兵禍)를 피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이 한양(漢陽)에서 가까운 강화(江華)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復印)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奉安)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史閣)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 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移安)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日帝)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에 이장(移藏)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문화권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끝까지 봐주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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