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독려를 하고 전화를 여러 번 하건만 참석하는 사람은 거의 일정 범주를 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서 충주의 모임은 종료되었다. 즐거운 모임에서 참석의 의미를 찾는 동기생은 그 옛날의 일들을 회고하는 시간과 담소의 시간, 그리고 저녁식사로 한우고기를 배불리 먹는 시간도 가졌다.
북충주 도로공사 사무실 앞에서 송*와 통화 수룡산림욕장으로 가고있다는 내용으로 영*와 14시20분 만나자마자 달려가 기다려도 올 시간이 지났건만 오지않아 통화하니 봉황자연휴양림 근처의 보훈원휴양소에서 헤맨다는 내용이다. 몇일전 함께 사전 답사해 익히 알 것으로 생각했는데 착각한 모양이다. 꽤 오랜시간이 흐른다음 도착하는데 차 드렁크에 수수대가 잔뜩 실려 있다. 광*는 다시 농장으로 가고 송*만 남아서 주차장에서 보이는 전망대까지만 다녀오기로 하고 다섯이서 출발한다.
위: 이번에 올랐던 뾰죽한 나무가 전망대, 아래: 길건너의 국사봉
임도로 천천히 이동하며 5분도 되지 않는 곳에 쉼터가 있는데 영*가 쉬자고 하지만 20여 분 오르면 또다른 쉼터가 있으니 그곳서 쉬자고하고 천천이 오르며 우리와 송*는 합류했고 쉼터에서 하염없이 기다려 보건만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셋이서 출발해 30여 분에 임도의 끝부분에 도착해 원형목으로 놓여진 계단길(181개와 38개)을 지그재그로 올라 삼거리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전망대에서 주변 전망을 살피며 휴식을 취한다.
내려오는 도중 영*의 연락을 받았는데 벌써 숙소에 도착하여 룸 키를 받았고 경*도 만났다고 해서 좀 기다리게 하고 셋은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갔다. 호텔 입구에는 충*까지 모여, 일단 숙소로 들어가 얘기를 하다가 17시40분 한우고기 식당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광*와 통화해 이곳으로 오도록 하고 고기를 사고 한 식당을 정해 식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와 송*가 준비한 지난 봄 아산의 사진 등을 본 후 충*네서 준비한 메밀전을 조금 먹고 돌아와 경*와 나는 간단히 더 한잔하고 와 잠을 청했다.
이튿날 목욕 가자고 모으는데 광*가 없다. 새벽같이 집으로 갔다는 소식, 3+2명이 목욕을 다녀와 광*와 통화 바뻐서 참석 못한다는 통화 후 올갱이해장국 집에서 올갱이해장국을 먹었는데 해장국이 좀 짯었다. 호텔로 와 주변을 정리하고 나와 사람을 점검하니 충*이 다시 방으로 갔단다. 새벽 목욕탕에서도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걱정이 앞선다. 다녀온 후 전하는 말은 이번에는 해결되었다는 얘기이다.
비내섬으로 앞장 서 갔는데 갈림에서 잘못 들었었고 철이 늦어서 갈대와 억새가 너무 초라했다. 비내섬을 되돌아나오자 영* 내자가 몸이 안좋다고 서울로 간다고 해 헤어져, 나머지 일곱 명은 충주가는 구길(38국도)을 따르다가 우측의 봉황지하차도를 통과해 봉황능바위길로 능암교를 건너고 내동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봉황마애불상군 주차장에서 안내판을 보며, 급경사의 계단 위를 보기만 한다.
되돌아 나와 묘곡내동길의 삼거리에서 수룡봉황길 우측도로를 타고 보훈휴양원 앞을 지나 다시 삼거리에서 좌측 도로 수룡봉황길로 아리주말농장을 지나 우측으로 대동교를 건너는 광*가 헤맨 길을 한바퀴 돌아 묘곡내동길로 달려 고구려비전시관을 들린다. 고구려비가 충주에도 있다는 사실은 그리 오래되지 못해 생소한 사람이 많다.
다시 나와 599 지방도를 잠시 달려 우회전해 탑평 2교를 건너 중앙탑길로 중앙탑공원을 들려 옛 추억을 더듬어 보고 중앙탑길에서 청금로로 달리다가 창동리 창동리 삼층석탑과 창동리 마애불이 있는 갓길에 차를 멈추고 창동마애불 가는 곳과 창동삼층석탑을 안내한다. 다음은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하여 전화로 예약을 하고, 탄금대 근처의 감로정으로 가 준비된 밥상을 대했다. 진수성찬으로 아침상이 부실했다며 모두는 흡족해 하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이번 모임을 정리하고 담소를 나누느라 식당에는 우리만 남았었다.
이제 헤어지기로 해, 송*는 경* 차에 편승하여 천안까지 다녀왔다는 통화가 있었고, 영*도 잘 도착했다는 확인전화가 되었으나 충*은 몇일간 통화 시도를 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해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후에도 여러번 시도가 허사일 뿐이다. 우리 부부는 다시 차를 되돌려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불상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구38국도 599지방도로를 거쳐
충주(忠州) 봉황리(鳳凰里)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보물 제 1401호
햇골산 기슭에서 약 30m되는 중턱의 바위 면 두 곳에 동쪽을 향해 새겨져 있다. 암벽의 높이 1.7m, 너비 5m정도인 넓은 바위에 한 줄로 8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삼국시대의 불상으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여래상의 당당한 어깨와 가슴, 손 모양, 두꺼운 옷주름 그리고 공양상의 고리장식과 허리띠 처리 등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며, 특히 팽이모양의 대좌나 보살상의 갸름한 얼굴은 고구려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불상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윗편에는 규모가 큰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두광에는 화불(化佛)이 5구 새겨져 있는데 귀엽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불 가운데 이른 시기인 6세기 말~7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멀지 않은 곳에 남한강이 있어 강변을 따라 불교문화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주 청룡사지(忠州 靑龍寺址)
청룡사지는 청계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청룡사와 관련된 대표적 인물로는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를 들 수 있는데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에 활동했던 고승으로
보우스님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이같은 고승이 활동하였던 청룡사는 조선 전기까지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과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는, 인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湖西勝覽)』에 그 이름이 전하고, 『여지도서(與地圖書)』
『충원현조』에 ‘현 북쪽 5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간행된 각종 지리지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으나
자세한 연혁과 내용은 알 수 없다.
청룡사와 관련된 유물로 국보 제197호 청룡사지 보각국사탑(靑龍寺址 普覺國師塔)과 보물 제658호 인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6호인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 등(靑龍寺址 普覺國師塔 前 獅子石燈),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42호 청룡사 위전비(靑龍寺 位田碑) 와 문화재자료 제54호 청룡사 석종형 승탑(靑龍寺 石鐘形 僧塔)을 비롯한 석종형 부도
(石鐘形 浮屠) 등이 남아있어 사찰의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중청길로 우회전 해 소태로•밤나무길•주치길•청룡사길을 거쳐 청룡사지를 돌아보고, 되돌려 목계교가 있는
599지방도에서 직진해 목계나루를 돌아보고, 목계교를 건너며 좌회전 해 반공애국자 묘역을 둘러보고
원룸이 있는 충주교통대 앞으로 돌아왔다.
루암리 고분군에도 잠시 들려서 고분군과 더좋았던 억새
위는 먼저 방문시의 자료사진을 첨부한 것입니다.
목계마을은 역서,문집 등에 줄곧 등장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산 정약용은 특별히 목계를 살기좋고 풍 류가 있는 곳으로 꼽았다. 정약용은
『택리지』 발문을 통해 “열수(列水;한강) 위쪽으로는 오직 여주의 백 애(白厓),충주의 목계(牧溪)가 좋은 곳으로 일컬어진다”며 목계의
풍요를 꼽았다. 최익현은 “4살 때 한양 에서 강을 거슬러 목계에 이삿짐을 부리고 80리 떨어진 청풍 금수산으로 들어갔다”며
당시 대형 짐배의 종착항을 알려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 생선과 영남 화물의 집산이며, 주민들은 장사를 하여 부자”라면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사흘에서 이레씩 장이 섰다”고 적고 있다. 김세렴은 1636년 8월19일 『해사 록(海槎錄)』에서 고개를 넘어 목계에 있는
지평 조공숙의 집에 이르렀다“며 목계지명을 처음으로 등장 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1866)에는
”목계진은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에서부터 원주•제 천으로 통한다“고 기술했다.
아! 사랑하는 목계(牧溪) 글 김영중
백두대간 타고 내려 온 중원의 정기가 목계 부흥산 머리에 이르고 태백 검룡소 물줄기 한강되어 만난 이 곳 그 옛날
무수한 돛단배 뗏목 서울 오고 가고 수만 군중 모여 동서 편 줄다리기 하며
풍년 무사 기원하던 백사장 그래서 포구로 대 성시 이루었으리라
수 백 년 이어온 포구의 영화는 어디 가고 지금은 강가에 돛단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대 성시 이루던 백사장엔 잡초만 무성한가
그러나 옛 목계나루 솔밭 머리에 여섯 분의 애국지사 모셨으니
그 혼이 이 마을 지켜 주어 또 다시 번영할 날 찾아 오리라 2002. 7.25
조국 대한의 자유민주 수호를 위하여 반공대열에서 젊은 날의 우국충정을 아낌없이 다 바치고 떼지은 붉은 무리 삼천리 금수강역을 동존상잔의 붉은 피로 얼룩지게 했던 6.25참극에 아깝게도 목숨마 져 다한 이선규 목계군민회 위원장 권중대 동 부위원장 변용출 동 감찰부장 김용기
목계 청년단장 홍선 식 동 부단장 박삼수 동 동원부장 제위의 무덤 앞에 삼가 이 비를 세워 살아서는 나라사랑의 지성을 다 했던 그 불요의 넋을 죽어서는 조국 수호의 화신의 명복을 길이 기리고 손모아 비는 뜻을 엮어 새기노니 이곳에 발길을 멈추는 뒷사람으로 하여금 다시한번
반공의 마음과 몸가짐을 가다듬어 六 지사의 남긴 뜻 을 영세토록 잊지않게 하여 재천의 령들을 위무코자 하노라
이 비는 대한노인회 목계회장 우태원 외 회원일동이 손수 갈고 다듬어 손창근 조각을 서기 一九七七년 六월二十五일
김지동 중원군수님의 특지로 재 제막하였음.
六志士: 이선규(李善圭), 권중대(權重大), 변용출(卞容出), 김용기(金容璂), 홍선식(洪善植), 박삼수(朴三壽)
이등중사 김양수, 일등병 이길상, 일등병 김상렬 아홉 분의 묘가 정돈되어 있다.
맺음말: 늘 준비는 요란하지만 실행을 하다가 보면 아쉬움 속에서 마무리 짓고 마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번 모임에도 웬만하면 두어시간 별로 힘들게 생각되지 않는 쇠바위봉까지 은근히 다녀오기를 바랬고, 비내섬의 은빛 물결을 기대해 봤지만 너무도 늦어져 억새의 이파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아쉬웠다. 한우고기도 시식을 했더라면 엉거주춤 하지는 않았으련만 그렇지 못한 아쉬움 속에 진행되었다. 내년 봄 5월 중하순은 온양서 만나기로 했으니 기대하며 우리의 모임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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