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계단을 되짚어 올라 탄금대기란 비석과 탄금정을 거쳐서 김지순의 묘를 들리며 이런데 묘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 의문을 품고 우륵선생의 탄금대란 석비를 거쳐 계단길을 내려서는데 좌측으로 충정공신립장군순절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 김지순 묘(金芝淳 墓): 김지순은 조선후기 충주목사 겸 충주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본 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수(士秀), 호는 사수당(士秀堂),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김이유(金履 裕)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영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충주목사 겸 충주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정상에
있다. 열두대 위에 있는 정자 탄금정에서 보이는 묘지이다.
망주석과 작은 문인석이 2기씩 자리하고 있다. 아들 김조근(金祖根; 1793~1844)의 딸이 헌종 의 비로 책봉되어 김조근은 영흥부원군에 봉해지고 김자순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비에는 증 영의정안동김공지순지묘(贈領議政安東金公芝淳之墓), 배정경부인여흥민씨부좌(配貞敬夫人驪興閔 氏祔左)라고 음기되어 있다. 이 비석은 4329년(1996)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by야초풍수 답사>
※ 우륵(于勒)선생의 탄금대: 이 곳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眞興王;551)때 당대의 악성(樂聖) 우륵선 생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 선생은 원래 가야국(伽倻國) 사람으로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으며 신라에 귀화(歸化)하여 왕의 배려로 국원 충주(國原 忠州)에 살면서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쳤으며 이때 가야금곡이 궁중악으로 되었다.
비각을 보고 다시 계단길로 내려서니 사유지란 간판의 찻집이 우측으로 입구가 있고 좌측의 넓은 도로로 나가니 대흥사가 자리하고 있다. [1956년 3월 승려 오법우에 의해 창건됨]
대흥사를 뒤로하고 우측도로로 2층 누각의 탄금사정(彈琴射亭)을 지나는데 무슨 행사를 준비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쓸고 닦고 부산스럽다. 다소 떨어져 탄금사정을 담고 휘돌아 활터의 중간쯤에서 다시 탄금사정과 시위의 표적을 담고 나무숲이 우거진 산책로로 길을 잡아 땅내음을 맡고 가는 앞에 소나무 몇그루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눈에 보인다.
지난 2월15일의 썰렁한 경치와 이번 방문시의 푸르름이 대조되는 탄금사정
지난 2월15일의 메마른 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궁의 표적판
그곳을 지나는데 어느 한분이 산책 중이다. 지나쳐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와 충주문화원 건물을 지나쳐 애마가 기다리는 주차장의 임란충신백기장군 조웅기적비, 우륵선생 추모비를 돌아봤다.
1994년 작품 '원(願)' 이관기 作
1994년 작품 '중원의 꿈' 김영원 作
※ 탄금대: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고적지이며 명승 제42호이다. 대문산(大門山)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신라 551년(진흥왕 12) 가야국에서 귀화한 악사(樂 士) 우륵이 이곳에서 금(琴)을 탔다(彈)는 것에서 탄금대(彈琴臺)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탄금대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金容殷)이 건립하고 육당(六堂) 최남선(崔 南善)이 찬한 탄금대비가 있으며, 또 1955년에 건립된 충혼탑과 항일시인 권태응(權泰應)선생의 감자꽃 노래비, 1976년에 건립된 탄금정 등과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 신립장군 순절비, 조웅장군 기적비 등이 함께 있습니다. 충주시/문화체육관광부
위: 1994년 작품 '초하' 엄태식 作, 1994년 작품 '여울-94' 홍창기 作
※조웅(趙熊.1567.명종 22-1592.선조 25):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백기(白旗).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조일(趙逸)이다.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누어 의병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충주 앙성면 태자우(현 능암리 대평촌)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사실을 충청도체찰사가 행재소의 임금에게 알려 충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조웅은 깃발을 모두 흰 것으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8도의 의병 중에 “호서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곽재우)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1592년 8월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군이 항복을 권했으나 저항하다가 1592년 8월 4일 사지가 찢겨지는 고통을 겪으며 순절했다.
사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18년(광해군 11)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90년(숙종 16) 정려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에 있다.
대략 한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대흥사 근처의 찻집에서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남한강의 굽이쳐 흐르는 강물도 보며, 그 옛날 선현들의 우국충정을 다시한번 되새김하는 것도 좋으리라.
1994년 작품 '삶과 존재' 김봉구 作
남한강 건너편은 충주시 금가면 우송리 지역이다.
위: 1994년 작품 '사랑' 정창훈 作, 아래: 1994년 작품 '기다림' 이기수 作
아래: 야외음악당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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