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우기

융건릉 산책길

아름답지만~ 2018. 9. 13. 18:17

내 어릴적 융릉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너무 가까이 소재하다가 보니 자주 찾고

특별히 놀이거리도 없어 경사진 언덕의 잘 다듬어진 잔디에서 여럿이 구르는 내기를 해,

어쩌다가 서로가 뒤엉키기도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골 소풍처이기도 했던, 자식을 둔 이후에도 봉분 가까이 다가가 석물들을 돌아보면서

능묘를 두른 석물을 유심히 쳐다보던 융릉의 기억은 너무도 세세한 부분까지도

머리에 남아 있다.

 

 

 

아래의 사진은 과거 봉분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던 추억의 사진을 복사했다.

울창하게 아람드리 소나무는 정조의 지극정성 때문인지 늘 푸르고 싱싱했으나

어느때 부터인가 왜가리 무리가 진을 치고 번식하며 나무들은 서서히 고사하여

베어지고 황량해졌다. 고사한 나무들이 없어지면서 왜가리들의 둥지는 다른 곳으로

이전해 갔고 작은 나무들만이 능의 경내를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내 나이도

칠십을 넘었으니 그동안 조그맣던 나무들도 50년 이상을 묵어서 아람드리 소나무로

된 감회를 갔고 형제들 내외가 산책을 했다.

 

 

 

그간 정부가 대대적인 정비와 울타리를 설치하기 전까지 입구는 융능과 건능이

따로 있었고 관리를 하던 재실이 중간쯤 있었다. 지금은 중앙의 재실쪽에 입구를

하나로 정비하고 둘레길도 만들고 규정된 산책로로 유도를 하면서 경관은 말끔해 졌고

어린이들의 놀이터와 젊은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손색이 없는 것 같았다.

또 띄엄띄엄 설치된 의자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내 고장 문화재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된 뿌듯한 감정 때문에 늘 단편적이었던 융건릉에 대한 안내문을 담고 정리해

더욱 많은 분들의 방문을 기대해 본다.

 

 

 

 

 

 

 

 

 

 

 

1. 다녀온 날: 2018년 9월 9일 일요일 10시30분~11시55분

2. 산책코스: 자주 융릉쪽으로의 산책길을 택하였으나 오늘은 건릉쪽 산책로를 따라

건릉을 담고 능선으로 올라 건릉의 정상쯤의 작은 돌탑도 거치고 융릉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 내려선 곳의 갈림길을 지나 경내의 가장 높은 산책로를 따라가 융릉을

잠시 들렸다가 융릉을 우측에 두고 산책길을 따르니 계곡 넓은 잔디밭이다. 전에는 나무를

키우던 곳이었다. 잠시후 만나는 삼거리(융릉과 건릉의 산책로 갈림길)에서 좌측 입구

쪽으로 해 입장시 빌렸던 부채를 반납하고 다음 행선지인 식당으로 향했다.

건릉(健陵): 건릉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 김씨

(孝懿王后 金氏 1753~1821)의 합장릉이다.

1899년 고종이 정조를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효의왕후를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했다.

원래 정조의 능은 융릉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곳에 합장하였다.

봉분을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둘러싼 것 외에는 규모와 형식이 융릉과 매우 비슷하다.

문석인, 무석인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며 문인석은 금관 조복을 입고 있는 등 19세기 왕릉

석물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합장릉: 왕과 왕비를 하나의 능에 모신 형태

금관조복: 문무백관이 국가행사 때 입는 대례복

 

 

 

 

 

조선왕릉(융릉, 건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2009년 6월30일

1. 소고: 주차장은 수많은 차들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함을 느꼈고 진출입 차량들이 뒤엉켜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을 허비했고, 점심을 하자고한 식당도 몇 번을 다녔던 곳인데도

헷갈려 입구를 몇 번만에 들었다. 나의 허리가 요즘들어 더욱 나빠진 듯해 형제들의 산책을

방해 한듯해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유수와 같은 세월에 이기는 장사가 있을까?

어차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서 더욱 나빠지지나 않도록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듯하다. 그래도 형제들이 명절 이외에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

서로가 협조하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고 자위해 본다.

 

수원방향 멀리 광교산의 자락과 앞의 조그마한 산은 팔달산, 아주 가까이는 군부대 시설인

수원공군비행장, 중간좌측 높은 건물은 경남아너스빌(45층)의 모습

 

융릉(隆陵):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莊祖; 1735~1762)와 혜경궁으로 알려진

헌경황후 홍씨(獻敬皇后 洪氏;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소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운

사도세자는 노론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1762년(영조 38)에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당시 양주에 있던 영우원(永祐 園)을 이곳으로

옮겨와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99년 고종이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莊祖 懿皇帝)로,

혜경궁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였다. 봉분 아랫부분은

십이지신상 자리에 모란과 연꽃 문양을 새긴 병풍석이 감싸고 있으며, 봉분과 지면이 맞닿는

부분에는 와첨석을 깔아서 장식하는 등 정교한 조영 기술이 돋보인다. 융릉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빚어낸 작품으로 조선왕릉 중에

가장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합장릉: 왕과 왕비를 하나의 능에 모신 형태

뒤주: 쌀을 담아 놓는 나무로 만든 궤짝

추숭: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

 

 

입구 매표소를 지나면 융릉과 건릉의 역사문화관이 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