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왕릉(甄萱王陵)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견훤은 원래 신라사람으로 아버지는 농민출신 장군인 아자개(阿慈介)였다. 견훤은 본래의 성이 이씨였으나 15세때 스스로 견씨로 고쳤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 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는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로 보아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케 한다.<by 다음백과3종>
『후백제의 왕 견훤(?~936)의 능으로 전한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현재의 문경시 가은읍)사람으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라 한다. 서기 900년 완산(完山; 현재 전주)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한 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인해 서기 936년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 수일 후에 황산불사(黃山佛寺)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은진(恩津)’조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에 떨어진 풍계촌(風界村)에 있는데, 속칭 “왕묘, 왕총”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종시 유언으로 완산이 그립다하여 이곳에 무덤을 썼다하는데, 실제로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의 모악산이 보이기도 한다. 무덤은 약 직경 10m, 높이 5m 크기의 규모인데, 1970년에 견씨 문중에서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는 비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왕릉쪽으로 오르며 나타나는 홍보판과 왕릉으로 오르는 계단길
견훤왕릉과 비석
미륵사지(彌勒寺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미륵사는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시대의 가장 큰 사찰로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금제사리봉영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위에 오른 서동이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중 용화산(현재 미륵산) 아래의 한 연못에 이르자 물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선화비의 간청으로 연못을 메워 탑과 불전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미륵사지 석탑(서원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는 백제 무왕 639년(己亥) 왕비였던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이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규모가 커진 미륵사는 조선중기인 1600년경까지 사찰의 기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용화산 아래 3원의 가람 배치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성불하여 용화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세 번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은 독특한 가람배치 외에 석탑의 건립, 금당 기단의 공간 구조, 석등의 조성과 사리장엄구 등의 공예품에서 나타나는 독창성은 백제의 문화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 건축문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미륵사지가 보여주는 백제문화는 신라나 일본의 고대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11호 석탑, 보물 제236호 당간지주, 보물 제1753호 금동향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석등하대석과 석탑출토 사리장엄구 등 중요 문화재가 남아 있다. 동원의 9층 석탑은 고고학•건축학적인 고증을 통해 1992년 복원되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다녔어도 익산시의 여행은 처음인 듯하다. 논산과 이웃하고 있어 자료의 조사도 미륵사지 만을 하여 가까운 왕궁유적지는 건너뛰는 우를 범하였고, 경쾌한 발걸음이 가능하다면 무왕길 코스도 한번 쯤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익산의 백제 (약도와 무왕길 안내)
- 무왕길 1 (18.4km, 도보 6시간20분) [익산쌍릉-2.0km-익산토성-3.3km-뜬바위-0.2km-구룡마 을대나무숲-2.4km-서동공원-2.9km-고도리석불입상-1.3km-왕궁리유적전시관-2.7km-익산쌍릉]
-무왕길 2 (8.3km, 도보 2시간40분) [왕궁리유적관-2.8km-제석사지-4.3km-서동생가터-1.2km- 익산쌍릉(익산토성)]』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 [국보 제11호]
사찰에서 탑은 부처님의 신골(身骨), 즉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미륵사지 서원에 있는 것으로 동원에도 이와같은 석탑이 또 하나 있었으며,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원에는 목탑이 있었다. 이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미륵사에는 탑이 3기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탑의 건립은 2009년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미륵사지 석탑은 639년(己亥), 백제 무왕의 왕비(沙乇積德)가 발원하여 세워졌으며, 1층 중앙 기둥에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목탑과 같은 이중 기단이다. 기단 위에 있는 1층 탑신의 각 면은 세 칸으로 나눠져 있고, 가운데 칸에 문이 있어 내부가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사각형 기둥이 있고, 탑의 외면에는 목조건물처럼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수법의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었고 그 위에 있는 받침돌이 지붕돌(屋蓋石)을 받치고 있는데, 이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추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얇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해진다.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든 것 외에는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북동쪽 부분이 6층까지 높이 16.24m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보수•정비 작업은 1998년 시작되었고 2016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단지 사진만 보았을 때는 덩그러니 탑만 보러가나 했는데 절터가 궁궐터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에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자책을 하며, 늦은 감은 있으나 국보를 보다 안전하고 고증에 입각하여 다시 복원중인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탑과는 너무도 규모나 높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동탑의 고증에 입각한 복원은 앞으로 서탑이 복원되면 다시 찾아봐야 될 곳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백제의 사찰에서 나타나는 금당지는 부여의 정림사지를 보았을 때나 백제문화단지에서 복원했다는 미륵사지 9층목탑 등, 백제의 옛유적지를 복사한 시설들이 이곳 미륵사지에서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복원된 동원9층석탑과 미륵사지의 일부분
4) 소고(小考)
나이 들어가며 역사가 재미있고 실타래를 풀어가는 듯 성취감이 있어서 좋았던 여행길, 조선시대 당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명재 윤증의 고택을 보았고, 우리나라에 두 곳 밖에 남지 않았다는 궐리사와 노성향교, 홀대받던 백제역사 중 비운의 장수 계백장군 유적지를 조성한 흔적에서 백제 말미의 역사를 다시한번 복습하고, 선비들의 한 부류인 기호학파를 이끌었던 김장생 유택도 역사를 끌어 내었으며, 드디어 찾아간 쌍계사의 전설 백화점이라는데 심취해 보았고, 일지총으로도 불리는 성삼문 묘소도 그 당시의 피비린내를 소름끼쳐 했으며 후손들이 보살핌에 다소 위안을 삼으며, 후삼국의 가장 강력했던 세력이 쉽게 무너진 원인도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었으며, 제아무리 큰 시설도 모두의 무관심이 되어버리면 한줌의 폐허로 변한다는 사실을 미륵사지 절터들의 흔적을 훑어보면서 역사를 중시해야 할 이유가 이런 것에서 있었다는 걸 알아야 되겠다. 우리가 과거를 구시대로만 인식하려는 자세에서 탈피해야 할 대목은 아닐는지 되짚어 보게된다. 언젠가는 교과과정에서 홀대받은 적도 있으니 정치도 역사와 함께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되겠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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