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및 산행

경주 양동마을-1

아름답지만~ 2017. 1. 27. 20:38

양동마을은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이씨는 찬성공 이반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집들은 대개 ‘ᄆ’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중기 영남 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기와집 주변의 초가집들은 옛날 기와집에 살았던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들이나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다. 1984년에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세계유산(世界遺産)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마을 양동(良洞)마을은 5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역사 마을로 2010년 7월31일 34차 세계유산위원회(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 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 다녀온 날: 2017년 1월 13일 금요일

                                                     위: 하촌 쪽서 바라본 관가정(제알 높은 기와집,

2) 가는 길: 경주 시내(고속버스터미널)에서 23.4km 떨어진 안강 인근의 강동면에

위치해 택시로는 25,000원이 넘는 거리이다. 버스를 타리라 마음 먹고 물어물어

버스정류장에 도착 문의하니 09시20분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 10여 분 기다리니

버스가 들어와 탔는데 바로 출발한다. 20분에 맞췄으면 놓칠뻔한 12분이다. 계명대

동산병원을 경유해 경주역에서 7번 국도로 내달려 30여 분후 양동마을 버스정류장을

들린다. 나갈 때를 계산하려고 버스시간표를 담는다.

203번 운행시간표

252번 운행시간표

구분

안강방면

시내방면

구분

안강 및 경주방면

출발시간

종착지

출발시간

종착지

출발시간

종착지

1

07:25

경주역→시외터미널→

신경주역

1

07:10

안강터미널

2

08:05

안강터미널⟷

옥산서원

08:40

경주역→시외터미널

2

10:10

3

09:50

10:35

3

14:45

4

11:05

11:55

경주역→시외터미널→

신경주역

4

17:45

5

13:05

13:35

5

19:05

경주터미널 방향

6

14:20

14:55

경주역→시외터미널

7

16:05

16:55

8

17:25

18:25

9

19:05

19:55

10

20:25

나갈 때를 맞추려고 담았으나 디카는 시간을 체크할 수가 없었다. 양동마을을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해 정리해 본다.

3) 양동마을 돌아보기: 다소 쌀쌀한 날씨는 일찍 찾아오는 손님들이 몇 분 계시지 않고

부부가 안내도를 의존해 둘러보는 재미는 풍경에 비해서는 별로였다. 밥 먹을 자리도

검토하지만 동절기는 거개가 휴업상태이다. 계획은 점심을 이곳에서 해결하고 구석구석

돌아볼 계획이었으나 쓸쓸한 마을 길에서 아내는 실증이 나는 듯 했다.

 

처음으로 들린 심수정, 수졸당, 근암고택, 상춘헌, 서백당, 낙선당, 대성헌, 무첨당, 향단,

관가정 및 이향정 등을 둘러보고 버스 시간표를 확인 여유로운 시간을 양동마을문화관에서

각 건물을 설명한 자료를 보고 식당(?)에서 핫도그와 쥬스류로 점심을 때우고 버스시간을

맞춰서 나왔다.

년도별로 다녀온 곳과 마을문화관에서 얻은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① 다녀온 곳

◎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

이 집은 경주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 1433~1484)가 만호 류복하 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 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손소의 아들 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인(忍)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위쪽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서백당을 들어가고,

                                                                        아래는 서백당 뒤켠의 사당

서백당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향나무는 본래 키가 23m까지도 자라는 상록성 큰키나무지만 이 향나무는 키가 약 7m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나 옆으로 긴 가지를 뻗어 수관 폭은 약 12m에 이르며, 나무가 자라는

상태도 좋은 편이다. 이 향나무의 수령은 약 60여 년으로 추정되며, 양민공 손소 선생이

조선 세조 5년(1459)에 양동마을에 들어와 종택 서백당을 지을 때 심은 것이라 고 전해진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손소공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뒤켠에 지리잡은 사당과 아래는 전래석을 전시한 모습

◎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종가 별채로, 그의 맏 손자인 무첨 당 이의간(無忝堂 李宜澗)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뒤쪽에 높게 서있는 건물이 사 당이고, 동쪽에 서있는 건물은 안채,사랑채,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이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祭廳)의 기능이 강했으며, 남성들이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를 하였던 큰 사 랑채로도 쓰였다. 대청의 우측 벽에 걸린 ‘좌해금서’라는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위: 무첨당의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글 '좌해금서'(우측 현판)

◎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병환 중 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것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 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려준 후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香壇公 李宜週)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 중기에 지어진 살림집의

전형이라기 보다는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행랑채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는데, 1976년에 보수할 때 위로 더 올라붙어 안채와 더욱 근접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있는데, 기와집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공간 구성을 보인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나

6.25한국전쟁으로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56칸이 보존되어 있다.

◎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문화재 제79호

이 집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병자 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노(樂善堂 孫宗老; 1598~1636)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양반가의 큰 집들은 기단을 높게 쌓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 은 기단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이 집의 주인은 천석꾼이었다고 하는데, 유난히 많은 곳간과 곡식을 찧었던 디딜방아채의

모습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본채 옆에 자리한 건물은 사당이다.

우제 손중돈의 현손(고손자)인 낙선당 손종노(樂善堂 孫宗老, 1598~1636)의 갈라진

종택으로 조선 중종 35년(1540)에 지었다. 집은 대문채,안채,행랑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ㅡ’자 모양의 사랑채가 안채 옆면에 이어져 있다. 사당 마당과 광채를 넉넉하게 나누었고,

보통의 양반집과 달리 기단을 낮게 세웠다. 집 구조가 간소하면서도 기능과 실용을

강조하였다는점에서 주목받는다.

◎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문화재 제81호

이 정자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壟齋 李彦适; 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ᄀ’자로 꺽고 그 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이렇듯

집이 바라보는 방향은 조상들이 집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이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며, 안락 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철종때 불에 타서 1917년 경 다시 지었다.

◎ 수졸당(守拙堂) 중요민속문화재자료 제78호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 潛; 1576~1635)이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사랑채는 이의잠의 6 세손인 양한당 이정규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지었으며 영조 20년(1744)쯤에 6대 손 대사헌 양한당

이정규(養閒堂 李鼎揆, 1735~1810)선생이 사랑채를 늘려 지었다 고 한다.

나란히 붙은 사랑채에 비해 대문채의 기단과 지붕이 낮은 것은 두 건물의 격식의 차이를 나타낸다.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어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 언덕에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꾸어 ‘반달동산’이라 부르며, 담장을 따 로 두른 사당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문화재 제79호

이 집은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二香亭 李範中, 1708~1783)이 조선 숙종 21 년(1695)에

지었고 그의 호를 따 붙였다고 한다. 안채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 이 인상적인데,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안마당 이 넓고 방앗간채가 따로 있으며,

곳간이 매우 많은 점으로 미루어 집주인이 부농이었 음을 짐작케 한다.

◎ 상춘헌(賞春軒) 중요민속문화재 제75호

이 집은 회재 이언적의 5세손인 동고 이덕록(東皐 李德祿; 1677~1743)이 영조 6년 (1730)경에

지은 것으로,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賞春軒 李錫贊)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 왔다. 이덕록의

종손이며 대사간을 역임한 이정덕(李鼎德)이 동쪽에 있는 사당을 지었다. 사랑채의 마당 한쪽

비탈진 곳에 계단식 정원을 조성하고 꽃나무들을 심어 운치가 있다. 작은 규모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배열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 대성헌(對聖軒)

이 집은 영조 8년(1732)에 이언적의 11세손인 이능단(李能亶)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 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 이재직(物窩 李在直)이 살던 집 이라 한다.

우리의 옛 집들은 빼어난 모양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자리한 경우가 많은 데, 그러한

산봉우리를 안대라고 부른다. 이 집은 안대를 성주봉으로 한 것이데, 집의 이 름도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성헌’이라 하였다. 사랑채의 두 칸 대청 앞쪽에

여덟짝의 문을 달아 4짝씩 접어 올리게 돼 있는 것이 특이하다.

◎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76호

이 집은 정조 4년(1780)경에 이정수(李鼎壽; 1758~1784)가 지은 것으로, 그의 증손자인

근암 이희구(謹庵 李熙久)가 홍릉 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참봉댁’ 또는 ‘근암고택’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여늬 집들과 달리 안채의 담장 밖에 따로 사랑채가 서있는 점이 특이 하다.

이 사랑채는 원래 안채와 직각으로 놓여있다가 소실된 것을 20세기 초에 새로 지 으면서

현재 위치로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채의 뒤로는 비탈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후원이 있어, 마을의 전경과 주위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2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