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및 산행

정토사지, 하늘재 다녀오기-2

아름답지만~ 2015. 11. 26. 08:13

하늘재와 미륵대원사지: 몇 번을 오갔건만 오랜만에 방문하는 미륵대원지 주차장이 꽤나 멀게만 느끼며 달려온 길. 하늘재의 입구를 찾으려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륵대원지 입구에서 하늘재 2.0km란 이정표를 만나는데 약 0.5km를 걸어온 것이다. 조금 더 간 곳 우측의 미륵리원터를 지나고 대광사와 갈리는 삼거리에는 하늘재 석비가 밑에는 충청북도 도지사와 충주시장의 하늘재를 연 역사적 고찰을 새겨 놓았다.

한강유역 진출을 위해 신라가 서기 156년에 개척한 후 고려때까지 사용된 길로 한자음으로는 鷄立嶺이라 표기되며,

지금은 하늘재로 불린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해발 530m,N. 3648’761“ E. 12806’802”

잊혀져 가는 고개들: 고개는 옛말로 재,,티 등으로 불리었으며, 우리 조상들의 삶의 발자취가 어려 있는 곳입니다. 지금의 고개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귀찮은 장애물이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기다림이 있던 장소였지요. 백두대간의

수많은 고개 중에서도 이곳 하늘재는 많은 역사 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랍니다.

鷄立嶺에서 하늘재까지

아달라 이사금 3(156)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 면 보내주지 않겠다.”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조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삼국사기 권45 열전 온달조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관음령은 계립령 아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백두대간상 우리나라 주요 고개[진부령,미시령,한계령,구룡령,대관령,단목령,싸리재,고치령,죽령,새재,화령, 추풍령,육십령,여원제]

이곳에서 들어선 길은 잘 다듬어져 있지만 비포장길,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하늘재와 연관된 이야기들이 간간히 붙어서 다시한번 되새겨 보기도 하고, 새로운 지식에 공부도 하면서 비포장길 때로는 돌로 이루어졌던 조금은 파손된 길로 이어지며 자연관찰로 입구를 지나 약간은 올라서는 길을 걷는다. 10여 분이 지나며 자연관찰로 출구와 만나고 오름은 이어진다.

                                                위: 앞에 보이는 다리가 자연관찰로로 들어가는 길, 아래: 흙길이 돌 깔린 길로

                                                      위: 평탄한 길, 아래: 자연관찰로 출구와 만나는 삼거리

우리 고유의 고갯길 하늘재’: ‘하늘재는 삼국시대 신라의 아사달 3년인 서기 156년에 열린,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입니다. 2천년 역사의 흥망성쇄를 말없이 지켜보며 수 없이 많은 전 설과 문화유적을 간직한 아름다운 옛길 하늘재는 소중히 할

 역사문화유산입니다.

하늘재의 다른 이름 찾기[계립령:지금의 닷돈재,하늘재,지릅재를 포함하여 부르는 이름//대원령:미륵대원 에서 시작되는 말로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

길가 커다란 바위를 지나 5분여 후 연아닮은 소나무 데크가 나오며 시 김연아 소나무와 보호수란 글판, 그리고 다소곳이 몸통을 꼬은 듯한 소나무가 있다. 여기서 다시 5분여 하늘재의 정상인 초소가 보이고 양측(포암산과 탄항산)의 이정표 및 입산제한 시간표가 있다.

김연아 소나무 작시 박윤규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녀였나

참수리 날개짓 우아하고 강력하게

그랜드 슬램을 이룬 어느 날

월악산 하늘재에

숨겨둔 날개옷 찾아 입고

하늘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연기를 펼치다가

차마, 지상의 사랑을 떨치지 못하여

절정의 동작 그대로

한 그루의 소나무가 되었구나

, 하늘도 시샘할

천상의 스페이어럴이여!

 

 

이곳은 백두대간을 타던 시절에 다녀간 낯익은 곳이지만 세월의 덫 때문에 많이 변해 있었고 특히 탄항산쪽은 나무데크로 언덕 위에는 기다란 돌에 하늘재를 새긴 석비가 있었고, 여기서 포암산의 바위벽이 정연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포암산 줄기를 보며, 멋 모르고 정신없이 따라다녔던 저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가면 대미산, 황정산이 나오겠지 하며 대미산 자락으로 올라붙던 옛날도 회상해 보았다.

                                   위: 하늘재 정상 경북구역에서 근무중임, 아래: 10여 년전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하늘재산장

계립령 유허비(鷄立嶺 遺墟碑): 청아(淸雅)한 기운을 가득 머뭄고 솔바람 들꽃 향기 그윽하게 피어내 며 구름 한 점 머무는 고즈넉한 백두대간의 고갯마루. 태초(太初)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 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長久)한 세월 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 (風霜)과 애환(哀歡)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鷄立嶺)이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 는 속칭 하늘재지릅재겨릅산대원령(大院嶺)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阿達羅 王) 3(156) 4월에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 (大路)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열렸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바로 충주에 이르고 그곳 부터는 남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는 길로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백제가 함께 중요시한 지역 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 지방을 교두보로 한강 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이곳 계립 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 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온달장군과 연개소문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 과 몽고의 차라대가 남하할 때 또한 홍건족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나쪽으로 몽진(蒙塵)할 때 도 이 고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불교의 성지(聖地)인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 었으나 전란(戰亂)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 전한다.

조선조(朝鮮朝) 태종 14(1414)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계립령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고개를 넘는 길손들에 게 지난 역사의 향취(香臭)를 전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다.

20011월 문경시장

포암산(布岩山): 포암산(961.8m)은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로 옛날에는 베바우산이라고 하였는데 하늘 을 가득 채우고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큰 베를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희게 우뚝 솟은 모습이 껍질을 벗겨 놓은 삼대 즉 지릅같이 보여서 마골산(麻骨山)이라고도 하고 계립산(鷄立山)이라고도 불렀다. 이 산 밑 고개인 하늘재는 신라때부터 사용한 옛고개이고 지금도 성벽이 남 아 있어 옛 향기를 느끼게 한다.

서서히 가을의 짧은 해가 기울음에 서둘러 하산해 미륵대원지를 들어가 몇 번을 다녀간 곳이지만 다시한번 차근차근 들여다보며, 건국대학생들이 뒤늦은 시간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를 배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하게 되는 민족이라고, 그럼 국회의원님들은 조선의 당쟁과 분열로 나라를 잃은 슬픈 역사를 모른다는 말인가? 서둘러 미륵대원지를 떠났다.

                                                     위: 미륵원터, 아래: 하늘재 석비 삼거리 근처

                                                              위: 미륵원터, 아래: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위: 미륵대원지의 석조귀부, 아래: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위: 사각석등 뒤로 오층석탑 그리고 석조여래입상, 아래: 석등과 석조여래입상

4) 돌아오는 길: 땅거미가 잦아드는 도로를 영덕에서 안동까지 야간운전하며 다시는 야간운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그때 혼난 추억이 잊어지기도 전이라 서둘러 귀가했지만 충주시내에 들어서면서는 깜깜해져 버린 후에야 원룸에 도착하고 말았다.

5) 에필로그: 어느때 부터인가 역사가 재미 있게 느껴지며, 뒤안길에 묻혀있는 역사를 꺼집어내는 취미가 붙어서 충주를 뒤진지 1년 여 가까워 오지만 아직도 몇군데가 더 남아있다. 그동안 깊이를 몰랐던 충주를 돌아다니며 더욱 역사에 흥미가 돋음에 감사할 뿐이다. 크게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를 보면 90% 이상을 돌아다녔다는 느낌이지만 추워지는 날씨에는 다소 뒤로 미뤄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혹 놀러갈 때 밥 먹을 집이 참고되지 않을까 주차장 앞 식당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