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경주 전설이 서린 곳

아름답지만~ 2017. 1. 30. 17:32

이번 여행중 전설이 연관된 곳을 따로 분리해서 기록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다녀온

일자도 다르고 기록이 많지도 않은 것이다. 여기서 다룰 곳은 염불사지, 서출지, 영지,

선덕여왕릉, 단석산, 굴불사지 석조사면석불과 백률사 대웅전을 다뤄 봅니다.

1) 염불사지 [경주 남산 전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慶州 南山 傳 念佛寺址 東•西三層石塔)]

이 곳은 염불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남산 동쪽 봉구곡 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피리사(避里寺)라는 절에 신이한 승려가 있어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염불 소리는 서라벌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스님을 공경하였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불렀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2기 모두 무너져 있었으며,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탑의 석재는 1963년 불국사 역 앞으로 옮겨져 도지동 이거사지

(移車寺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과 합하여 새로운 탑을 세우는데 이용되었으며, 이후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 공사를 위하여 2008년 1월에 해체하였다.

염불사지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2009년 1월에 동•서삼층석탑의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

※ 이곳은 남산 칠불암을 다녀서 오다가 들렸던 곳으로 아주 오래전 경주여행시 서출지를

다녀 갈때는 발굴 복원이 안되었던 곳이다.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주 남산동동•

서삼층석탑도 있으며, 이곳은 단지 석탑만이 존재하지만 전하는 얘기로 이곳에서 다루었다.

2) 서출지(書出池 ) [서출지(書出池) 사적 제138호]

이곳은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의 목숨을 구한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이다. 소지왕 10년(488) 정월 대보름날에 왕이 궁 밖으로 행차하였는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쥐가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하였다. 왕이 병사를 시켜

따라가게 하였더니 이 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거문고 갑(射琴匣)을

쏘시오”라고 쓴 편지를 바쳤다. 이에 왕이 궁으로 돌아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랫더니 그 속에 몰래 숨어 있던 궁주(宮主)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 뒤로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서출지’라 하였으며, 정월 대보름 날에는 소지왕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경주

지역에서도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다 찰밥을 묻어두는 “까마귀 밥주자”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가에는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任勣)이 지은 이요당

(二樂堂)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 이요당(二樂堂) [이요당은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任勣; 1612~1672)이 지은 건물이다.

연못에 돌을 쌓아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당초에는 3칸 규모였으나 다섯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현재는 정면 4칸,측면 2칸, 팔작지붕 ‘ᄀ자’ 모양의 구조를 갖추었다.

임적은 가뭄이 심했을 때 땅 밑의 물줄기를 찾아내어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다. 이요당은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뜻을

취해 편액(扁額)하였으며, 남쪽 양피못 언덕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任剋)이 지은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 산수당(山水堂)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2

산수당 풍천임씨(豊川任氏) 시조 온(溫)의 19세손 임극(任剋)이 경주 배반동 능지촌의 송암정

(松庵 亭)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산수당이라 편액하였다. 서기 1733년경 남산으로 이사하면서

그때의 건물은 멸실되었다. 이를 복원하지 못한 채 긴 세월이 흐른 뒤 서기 1901년 주손 태순

(泰淳)이 이 이요당(二樂堂) 서쪽에 살림집을 매입하여 그동안 오랜 숙원이었던 정자복원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위치와 형태가 적합하지 못하여 1941년 지금의 이곳 탑마을 양피지(讓避池)

둔덕으로 건물을 신축 이전하였다. 다시 60여 년이 지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주손 훈(薰) 후손

운식(雲植) 우식(祐植) 유사 인희(寅熙) 전종문이 힘을 모아 서기 2007년 터를 확장하여 5칸

팔작지붕으로 중창하였다. 두 차례의 이건기문(移建記文)은 수헌(修軒) 최현필(崔鉉弼)과 영천

(靈川) 김상우(金相宇) 가 중창 상량문은 여강(驪江) 이영원(李榮源)이 썼다. 이 건물은 크지는

않지만 문중의 변천과 종문 간의 효우돈목(孝友敦睦)이 함축되어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또한

앞에는 문천이 사철 흐르고 뒤에는 수려한 금오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군자의 기상과 이요당(二樂堂) 산수당(山水堂)

형제간의 남다른 우애를 잘 나타내고 있다.

※ 염불사지를 지나고 맨먼저 만난 곳은 산수당, 그다음 서출지이고 다음이 이요당이었다.

서출지도 예전의 모습과 다른 개발을 거친듯 모습은 생각나지 않으나, 이름만을 들었을 때

분명히 다녀간 곳이건만 전혀 생소하기만 하다.

                                                          서출지 옆 쉼터의 모습(위,아래)

3) 영지(影池)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영지는 경덕왕 10년(751)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지을 때 옛 백제지역 출신의

석공 아사달(阿斯達)과 아내 아사녀(阿斯女)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곳이다.

불후의 걸작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여념이 없던 남편 아사달을 찾아 서라벌로

온 아사녀는, 이 연못가에서 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다 지쳐 못에 비친 탑의

환영(幻影)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물 속에 뛰어 들었다. 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를 찾아온 아사달은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에 뛰어

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못을 영지(影池)라 하였고 그 때 못에 그림자가 비친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못 가에는 옛날 두 사람을 위해 지은 영사(影寺)의 돌부처가 남아 있으며, 늦가을

맑은 날 오후에는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의 그림자가 못에 비친다.

※ 택시로 원성왕릉을 보고 들린 곳, 택시가 아니었다면 영지를 한바퀴 돌고 영지

석불좌상도 찾았으면 했으나 빨리 여러 곳을 다닌다는 생각으로 영지의 제방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는데, 날씨가 차가워서인지

새파란 물빛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 훗날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한바퀴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고 관광 했으면~

4)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사적 제182호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산등성이 중턱에 있다.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진짜로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30여 년이 지난

문무왕(文武王) 19년(679)에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라고 한다.

※ 영지를 다녀나와 성덕왕릉을 가자하니 잘 몰라 주소를 가르쳐 주고 다녀 나온 후

신무왕릉을 들렸다가 사천왕사지를 지나 철길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낭산 자락으로 오르니

수많은 무연고 묘가 산재한 소나무 사이를 오르니 묘역이 나타난다.

                                           위는 사천왕사지, 아래는 선덕여왕릉 오르는 중간

5) 단석산(斷石山)

단석산은 신라시대 때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산 이름은 김유신이

17세때 난능이라는 도사에게 전술 받은 신술로 큰 바위를 단칼로 내리쳤더니 바위가

갈라졌다는 전설에서 단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데서 유래한다.

※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본 후 40여 분간 등산한 후 정상에 오르니 갈라졌다는

바위가 정상에 있다. 되돌아 내려온 마애불상군 까지는 30여 분이 소요되었었다.

6) 굴불사지 사면석불(掘佛寺址 四面石佛) 보물 제121호, 통일신라시대 8세기

이 불상은 경주의 북쪽 산인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약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면불(四面佛)형태이다.

불상은 서쪽 면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동쪽 면에는 약사여래좌상

(藥師如來坐像), 남쪽 면에는 삼존입상, 북쪽 면에는 보살상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북쪽 면의 보살상 중 한 분은 얼굴이 열하나에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입상

(觀世音菩薩立像)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시대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1985년의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金鼓)에는 굴석사(掘石寺)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 경주역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택시로 경주시청 앞을 지나 백율사 주차장에 내려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굴불사지에 도착했다.

7) 백률사 대웅전(栢栗寺 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호,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406-1

백률사는『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刺楸寺)일 것이라 한다.

자추사가 맞다면 신라 법흥왕(法興王)14년(527)에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도록

순교(殉敎)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리기 위한 절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그 후 다시 지어졌다. 단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으로

좌우 협칸에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기단부는 일부 신라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불국사(佛國寺)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毗盧遮那佛坐像)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세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金銅佛)로

알려져 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위는 백률사 대웅전, 아래는 2013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담은 이차돈 순교비

※ 굴불사지를 지나 소금강산 중턱 쯤에 도착한 곳이 백률사 대웅전이다. 이곳을 본 후 소금강산

정상을 밟고자 올랐으나 산불감시초소만 덩그러니 있고 표지석이 박혀 있다. 시간상 동천동

마애삼존불상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하산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다.

                                       굴불사지에서 백률사로 오르는 중간의 대숲과 송죽당

소금강산 정상의 삼각점

 우리가 자랄 때 어린시절 전설이 섞인 이야기는 웬지 모르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 였으며, 이제 우리가 자라나는 손자들에게 이야기 해줘야 할 터인데 날로

발전한 ‘I T’기술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듣는 것보다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좀더 친숙하고 재미있는 시대로 도래하였으니, 우리들 할아버지 세대는

어린이들에게는 좀 친숙함이 덜한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를 일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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