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경주 교동 최부자집(慶州 校洞 崔富者宅)

아름답지만~ 2017. 1. 29. 15:09

경주에 가면 최부자집이 있는데 부자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를 가르켜 주고 있으며

부자이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는 태도와 12대를 이어온 만석지기는 여러모로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태도에 대해 곱씹어 볼만한 일이라 하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리 최부자의 여러 면을 공부했던 터라 그리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한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음은 비록 부자로는 살았지만

철저하게 백성들의 아픔에 함께 걱정하고 도움되는 일들을 이어갔다.

1) 찾아간 날: 2017년 1월 11일 15시~15시 15분

2) 가는 길: 남산의 칠불암을 찾은 후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고 갯마을 앞까지 걸은 후

버스를 타고 국립경주박물관 앞에서 내려 남천을 끼고 일정로 약 1.8km를 걸어서 늦은

점심을 먹고 구경하기로 했는데, 최가밥상이나 요석궁 모두 휴업중이다. 난감해 하며

다른 밥집을 찾은게 한정식 ‘명가’였다. 점심 먹은 후의 방문이다.

                              4년전 복구가 아직도 뒷걸음 치는지의 월정교, 점심 먹은집 '명가'와 상차림

3) 최씨고택 둘러보기: 낮지만 솟을 대문이 반기는 옆 안내판에는 1947년 12대손 문파

최준(汶坡 崔浚)선생이 기증하였으며 현재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다는

문구가 있다. 흔쾌히 사회를 위해서 희사할 수 있는 정신이 얼마나 고귀한가? 또

영남학원에서는 기증한 분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이 터는 원래 요석궁이 자리했던 곳이라 전하며 주변으로는 경주 향교와 고분, 재매정 등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요석궁은 신라의 요석공주가 기거하던 곳이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의 어머니이다. 마치 역사를 퍼즐게임하듯

꼬리를 물고 나오는 듯한 곳이란다.

집을 지을 때는 유림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뜻을 수용하여 향교 보다 2계단 낮게 터를

깍아내고 지었다고 하니 요즘 돈 좀 있는 사람들의 무조건식 건축 행위에 대한 경종 내지는

지역민들의 민의를 반영하는 태도가 절실히 요망되는 부분이다.

1970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사랑채는 2006년 복원하였으며, 사랑채는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연암 최익현,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의친왕 이강 등의 당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정원내의 석탑과 사당

최부자집의 1년 쌀 생산량은 3천석 이었다고 하는데 1천석은 사용하고 1천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1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며,

그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는 현존하는 목재곶간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글은 신선한 충격이다.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라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육훈과 육연’을 가슴에 새겨

‘베푸는 삶’을 실천했다. 또 삶에 있어서 중용(中庸)과 의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가치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산다.”는 현재 우리가 처한 극과 극의 시대적 상황에서 배움을 열어야

하겠다. 입구의 우측에 설치된 안내글을 복기하면 아래와 같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慶州 校洞 崔氏古宅) 중요민속자료 제27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이 가옥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南川)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ᄆ’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자 모양이다.

사당(祠堂)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 고 한다.

부자로서 취하여야 할 태도와 겸손을 우리 사회에 접목하여 보다 더 편안하고 서로가

도웁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임을 느끼는 바가 매우 컷다고 생각한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 내 편액(扁額) 해설

 용암고택(龍庵古宅)/ 용(龍)의 정기(精氣)가 스며드는 집

[최진립(崔震立)장군(최치원<崔致遠>선생의 17세손,12대 최부자 중 1대)의 후손인 최기영

(崔基永; 12대 최부자 중 8대)의 호(號)를 따서 지은 집]

글쓴이: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4세종손 우산(愚山) 최채량(崔採亮)

대우헌(大愚軒)/ ‘크게 어리석다’는 뜻 [12대 최부자 중 9대 최세린(崔世隣)의 호(號)]

 둔차(鈍次)/ ‘재주가 둔하다’는 뜻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崔浚)의 부친 최현식(崔鉉軾)의 호(號)]

이와같이 경주 최부자는 역대(8代,9代,11代) 선조의 호(號)를 통하여 부자지만 ‘겸손(謙遜)’을 강조함

 

사람이 일생동안 영화를 누리며 갈 수도 있지만 흔적도 없이 살아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영화를 누렸으면서도 이웃과 함께 하려는 생각을 갖고 후대까지 이어지도록

했다는데 더욱 최부자 댁의 훌륭한 정신이 온 누리에 퍼졌으면 하고 생각을 해 보며

짧은 시간이나마 겸손과 이웃 사랑을 배워 본다.

                             위는 독립유공자 문파 최준선생의 안내글, 아래는 최준 선생의 아우로서 안내글

위의 글을 복기한 내용을 참고로 기록하면 아래와 같다.

   독립유공자 최준(崔浚) 선생 생가 소재지: 경주시 교동 69

문파 최준(汶坡 崔浚; 1884~1970)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한광복회 (大韓光復會)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 아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 (獄苦)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白山商會)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 로 삼고자 한다.

   독립유공자 최완(崔浣) 선생 생가 경주시 교동 68번지

최완(崔浣; 1889~1927)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浚)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이원식•윤병호•서상일 등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新民會)계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의 강제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財務部委員)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調査員)과 의정원의원(議政院議員)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인생의 좌표로 삼을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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