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경주 양동마을-2

아름답지만~ 2017. 1. 28. 21:06

② 자료정리

◎ 수운정(水雲亭) 중요민속문화재 제80호

우재 손중돈의 증손자 청허재 손엽(淸虛齋 孫曄, 1544~1600)이 세운 정자로 이름은 ‘수청운허(水淸雲虛,

물처럼 맑고 구름처럼 허무하다)’에서 따서 붙였다고 한다. 조선 선 조 15년(1582)쯤에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이곳에 모셔 난을 피하 였다고 전한다. 양동에 있는 여러 정자 가운데

자리가 좋고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평가 받는다.

두곡고택(杜谷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77호

이언적의 6대손 이식중(李湜中, 1711~1777)이 조선 영조 9년(1733)쯤에 세운 집으로 훗날 두곡

이조원(杜谷 李祖源, 1864~1934)이 사들여 이조원의 호를 따 ‘두곡 고택’이 라 한다. 남촌의 대표적

대가로 안채,사랑채,아래채로 이루어진 튼ᄆ자 기본 평면 구조이 다. 지형상 서쪽이 낮고 허한 점을

보완하고자 앞뒤로 딸린 건물들을 나누어 배치하였 고, 넓은 평지에 지세를 잘 이용하여 지은 집이다.

◎ 안락정(安樂亭) 중요민속문화재 제82호

손씨 문중 건물로 이씨 문중의 강학당과 쌍벽을 이루는 서당이다. 조선 영조 52년 (1776)쯤에 지었으며

마을로 들어서는 동쪽 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소박하고 간소하 게 지은 조선시대 건축으로 강학당과

함께 양동마을에서 후손들을 교육한 공간이었다.

◎ 사호당 고택(沙湖堂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74호

사호당 이능승(沙湖堂 李能升, 1827~1881)이 살던 집으로 사호당이라고 부른다. 조선 헌종

6년(1840)에 지은 일반적인 ᄆ자 기본 평면 구조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사랑채,행 랑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ᄃ자 모양 안채에 ‘ㅡ’자 모양 행랑채가 놓여 전체적으로 ᄆ자 모양을

이루고, ‘ㅡ’자 모양 사랑채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영남지방 가옥 구 조를 따르고

있지만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방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문화재 제83호

여강이씨 문중의 공용 서당으로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知足堂 李淵祥, 1788~1846)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다. 조선 고종 4년(1867)쯤에 후학들이 계를 들어 지었다고 한다. 이씨

문중에는 경산 서당도 있으나 강학당이 더 역사가 깊다.

4) 돌아오기: 여행 중 양식으로 때우는 건 딸네 가서 여행 중 이후 처음이다.

13시35분 버스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왔다.

5) 소회: 그 옛날 경주와 한참 떨어진 곳에 양반들이 집단 마을을 형성한 것에

감탄스러울 뿐이며, 설창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만든 물(勿)자형 능선들이 네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곳곳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어

풍경은 좋았으나 겨울의 방문이 너무 쓸쓸해 마을 앞의 연꽃이나 화단의

화초들이 없는 계절의 방문은 무리인 듯하다. 나올 때 한 팀을 인솔하고 다니는

문화해설사가 관광을 재미있게 해 줄 수 있다는데 다행스러움을 느꼈으며

고등학교까지의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는데 극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양동마을 동쪽의 산 '성주봉' , 아래는 근암고택으로 가는 길(앞 뒤)

                                          군데군데 설치된 이정표 중의 하나, 각 고택마다 있는 관람수칙 안내판

아래는 보충 자료입니다.

손중돈과 이언적

◎ 경절공(景節公)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

김종직의 제자로 1489년(성종 20)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봉교를 거쳐 관리를 감찰하는

여러 관직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에 사복시정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횡포를 지적하던 간관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왕에게 신임을 얻었고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로 승정원 좌승지, 사헌부 대사헌, 경상•전라•충청•함경도

관찰사, 공조 •예조참판,공조•이조 판서,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냈다. 중종 때 청백리로 뽑혔고 경주

동강서원과 상주 속수서원(현 경북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에 모셔졌다.

◎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인 손중돈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면서 기초적인 학문을

익혔고, 1514년(중종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비롯한 인동 현감, 사헌부 장령, 밀양 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김안로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37년(중종 25)에 다시 기용되어 전주 부윤,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형조•예조 판서, 경상도 관찰사, 의정부 좌찬성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주리 학설은 퇴계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저서로는 “대학장구보유”, “속대학록문”,

“봉선잡의”, “구인록”, “진수팔규”, “중용구경연의”등이 있다.

1569년(선조 2)에 명종 묘종에 배향되고, 1573년(선조 6)에 경주 옥산서원에 모셔졌으며,

1610년(광해군 2)에는 문묘(공자의 사당)에 모셔졌다.

풍수지리(風水地理)

양동마을은 풍수지리로는 역수지형(逆水地形)이다. 이런 형국에서는 마을이 번창하고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경주에서 흘러오는 형산강 물이 마을을 향하여 거꾸로 흐르고 있고, 물의

흐름 또한 완만하여 사람의 마음 또한 서두르거나 좀스럽지 않게 하고 여유롭고 너그럽게 한다.

양동마을의 형국은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만든 ‘勿(물)’자 모양의 능선들이

네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勿(물)’자는 풍수적으로는 깨끗하다는 뜻이며, 이 뜻을 지키려고

양동의 종택들은 모두 이들 능선의 가장 높은 곳을 피하고 그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양동마을 의 안산인 성주봉은 붓이나 마늘쪽 또는 삿갓처럼 생겨서, 사람의 심성을

부드럽게 하여 마을에 범 죄가 없고, 사람들이 학문에 뜻이 높아 과거 합격자와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고 한 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