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고소대(姑蘇臺)[일종의 포루로써 장대(將臺)로 사용되었으며 충무공 이순신이
군령을 내리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이순신의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이 비석의 건립 경위를 기록한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부하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운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by 안내글 인용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통제이공수군대첩비’로서 ‘좌수영대첩비’
라고도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비석으로,
국내 비석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1615년(광해군 7년) 이순신의 부하였던 유형(柳珩)이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그곳에서
보내온 가장 좋은 석질의 빗돌로 세웠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 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金尙容)의 글씨이며, 비문은 오성대감 이항복(李恒 福)이 짓고, 명필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1942년 여수경찰서장인 일본인 마스키(松木)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비각을 헐고 이
비석과 타루비를 감추어 버렸는데, 이를 1946년 경복궁 뜰에서 발견하고 1947년 여수
사람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가 이곳에 복원하였다.] by 안내글 인용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임진년에 왜적이 함대를 몰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몰려 들어올 때
가로막힌 곳은 한산도(閑山島)요, 경계점은 노량(露梁)이요, 가장 험한 곳은 명량이었다. 한산도를
빼앗기면 노량을 지키지 못할 것이요, 명량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서울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당시에 이 세 군대의 요지를 막아 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는 곧 통제사이공(統制使李公)이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곧 적과의 결전을 개시하여 옥포(玉浦),노량(露梁),당포(唐浦),율포(栗浦),
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 등 여러 곳에서 크게 승리하여 이백 이십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오백구십여 명의 적병을 죽이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로부터 적들은 감히 공의 진영 부근을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은 한산도에 주둔하여 적이 나아갈 길을 막았다.
1597년 공이 모함을 당하여 이 곳을 떠나자 바로 한산도는 적병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항급한
정부는 다시 공을 기용하여 통제사의 직에 재임시켰다. 단신으로 부임한 공은 병졸을 모아서 명량에
주둔했다가 갑자기 습격해 오는 많은 적군을 적은 군대로 대항하여 새로 모은 십삼척의 배로 수만에
이르는 적군을 쳐부수고 적선 삼십 척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다그쳐 공격하니 적들은 마침내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이 때 중국에서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원군하러 왔는데, 수군제독 진린 (水軍提督
陳璘)이 공과 합세하게 되었다. 진린은 공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공(李公)’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 해 겨울에 적군은 다시 모든 세력을 연합하여 노량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공은 직접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중국군과 협공의 태세를 갖추어 전진하였다.
새벽에 이르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니 적군은 산산이 부서져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빳다. 그러나,
전투가 미쳐 끝나기 전에 공은 적탄에 맞아 쓸어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내가 죽은 것을 비밀에
붙이고 그대로 전투를 강행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쓸어지면서 “이제는 함께 싸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하며 애통하였고 중국군들도 고기를 먹지 않고
슬퍼하였으며 남방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통곡하며 곳곳에서 길을 막고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선조(宣祖)는 체찰사 이항복(體察使 李恒福)에게 명하여 이 곳에 사당을
지으라고 하였다. 항복이 현지에 오니 당시의 통제사인 이시언(李時言)이 감격한 마음으로 이를
주관하고, 공의 부하였던 장졸들이 기꺼이 앞을 다투어 공사에 참가하여 짧은 기간에 사당이 준공
되었다. 15년 후인 1614년에 통제사 유형(柳珩)이 이 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다가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했는데, 강음(江陰)에서 석재를 구하여 해로로 서울을 경유하여 현지에 까지
운반하였고 몇 해가 지난 뒤에 절도사 안륵(安玏)이 새로 부임하여 충무공의 아들인 전 현감 이회
(李薈)공의 부하였던 현감 임영(林英) 전 판관 정원명(鄭元溟)등과 함께 석공을 모집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호조참의 이창정(李昌庭), 순천부사 강복성(康復誠)이 경비를 조달하고, 이웃 고을의
수령들도 물자를 보조하여 반 년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충무공이 통제사로 있을 때에 유형은 해남
현감으로 보좌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관계는 비를 세우기 위하여 앞장 서게 된 중요한
인연이었다. 1620년에 비가 완성되었고, 앞서 충무공의 부하 병졸들이 세운 타루비(墮淚碑)도 이 곳에
옮겨 한자리에 세웠다. 타루비는 이 지역의 장졸들이 충무공의 유적을 밟을 적마다 눈물을 흘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비는 유형의 부탁으로 오성부원군 이항복(鰲城府院君 李恒福)이 짓고, 비가 준공된 뒤에 다시 작은
돌을 다듬어 비를 건립한 전후 내력을 새겼는데 시일이 경과되는 동안 글씨가 망그러진 부분이 많았다.
1728년 유형의 증손 유성채(柳星彩)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비각을 중수하고, 작은 비석을 갈고
다시 령중추부사 남구만(領中樞府事 南九萬)에게 부탁하여 추가하여 그 후 사실을 새겼다.
1980년 9월 문화재 위원 임창순(任昌淳) 역술하고 김병남(金炳南) 쓰다.
2010년 12월 27일 좌수영대첩비는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로 명칭 변경 ※동판의 글씨를 복기항 것입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墮淚碑)[타루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603년(선조 36 년)에
부하들이 세운 공덕비이다. 타루(墮淚)는 비석을 바라보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는 부하들의 충심이 비 이름에
그대로 묻어 있다.] by 안내글 인용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는 1698년(숙종 24년)에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대첩비를 건립하는데 참여한 인물들과 그 경위, 그리고 건립하기
까지의 어려움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은 진안현감 심인조(沈仁祚)가 남겼다.] by 안내글 인용
동령소갈비
❍참으로 위대한 장군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훌륭한 장군이었기에 손명하신 후
그 분의 밑에서 함께 전투를 하였던 분들이 서로 협력하고, 이웃 고을에서도 협력하여
대첩비를 지은 것에 감복하였고, 장군의 손명에 그를 섬기던 수많은 장졸들이 세웠다는
타루비가 비록 전쟁중 돌아가셨지만 잊지 않고 있다는 실증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세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흔적뿐이라는 오포대는 생략하고 고소대 옆 270년이나 된
느티나무를 보고 입구로 나오니 과거 세계첫챔피온이었던 김기수가 연습했었다는
복싱관이 있었는데, 유제두도 이곳 출신이라니 복싱관의 대부쯤 될것 같았다.
천사 벽화골목 9번길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이순신광장으로 내려서 잠시 휴식을
한 후 거북선 내로 들어가 비록 밀납인형이지만 그시대 그들 업무를 재현하는
모습들을 둘러보고 나왔다.
고소동 천사마을 지도에 우리가 걸은 길을 불게 만들어 이해를 도왔다.
•우리나라 최초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아십니까?[[김기수 선수는 1966년 7월 12일
우리 나라 복싱 역사상 최초로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하였습니다. 이 곳은
세계챔피언 김기수 선수가 세계챔피언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훈련했던 복싱 도장입니다.
또한 WBA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 유제두 선수를 배출해 낸 한국복싱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도장은 여수에서 두 명의 세계챔피언을 배출해낸 챔피언
제조기 방호남님이 건립한 여수복싱 도장입니다. {여수도장현항 위치: 여수시 고소동
626-1번지, 건축년도: 1965년, 건립자: 방호남(김기수, 유제두 스승), 면적: 130㎡}]
⑨전라좌수영 거북선(全羅左水營 龜船)[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는 총 구멍이 여섯 개가 있었다.
「선조수정실록」권26 선조 25년(1592) 5월 1일(경신)
사면을 판옥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선조실록」 권82 선조 29년(1596) 11월 7일(기해)
거북선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군관 나대용과 지역
선박 기술자들에 의해 건조된 함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거북선은 단 세 척이며
전라좌수영 선소(여수시 중앙동), 방답진 선소(여수시 돌산읍), 순천부 선소
(여수시 시전동)에서 각 한 척씩 건조되었다.
여수시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건조지로서 역사를 조명하고 원형에 가까운 거북선을
건조하고자 학술조사와 자문회의 결과를 토대로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현 위치
(전라좌수영 옛터)에서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제작하였다.]
✴여수 평화의 소녀상[오랜 침묵의 뼈로, 푸른 어둠의 가슴앓이로 살아서도 죽고
죽어서도 살아 여기 찟긴 바람의 지문으로 앉다. 피 젖은 귀향, 열다섯 단발머리
소녀의 눈빛을 보라.기억과 망각의 이 땅 평화와 인권을 위해 여기, 한 마리 나비 되어 앉다.
2017. 3. 1 여수평화의 상 건립추진위원회 ]
❍이순신광장은 넓은 면적에 비해 시설물은 많지는 않았다. 로타리의 이순신장군
동상과 높은 곳에 올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전망대, 거북선과 한 쪽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서둘러 오동도로 이동키로 하고 택시로 입구에 내렸다.
5부 마지막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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