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필자가 말무덤을 알게된 건 2005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알고 문경을 조사하면서
또다시 우왕좌왕 하며 자료를 찾다가 이번에 직접 찾고자 작심하고 떠났으며, 그 과정중에서
동로면의 오미자마을을 알게 되었으나, 시기적으로 나뭇가지만 앙상한 오미자를 스쳤을
뿐이었고 여우목(해발 620m)을 굽이굽이 돌아서 찾았고 되돌아 나오면서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 숨었다가 체포된 여우목성지의 입구를 보고 홍베로니카 치명터를 들렸다가
다음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여우목 정상의 여좌정과 관광안내도
이곳은 이윤일 요한 성인이 박해를 피해 30여 명의 신자들과 교우촌을 이루어 신앙의 삶을 살던
여우목 입구이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이윤일 공소회장과 그의 가족 8명, 공소신자 30여 명이
체포되어 문경현으로 이송되던 중 홍 베로니카는 이곳에서 포졸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홍 베로니카는 여우목 아래 큰 마을에 살던 80여 세된 할머니였다. 병인박해로 신자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붙잡혀 갈 때 나이가 많아서 잘 걷지 못하여 계속 대열에서 뒤떨어지자 포졸이 “노파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놓아 줄텐데, 왜 힘들게 굳이 따라가느냐? 안 믿는다고
한마디만 하라”고 하자, 홍베로니카는 “믿고 있는데 어째 안 맏는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자 포졸들이 “죽고 없는 것을 왜 믿느냐?” 계속 핀잔을 주자 홍 베로니카는
'살아 있는 천주님을 왜 죽었다고 하느냐?'며 항변했다. 이에 화가 난 포졸이 홍 베로니카를 쳐
죽였다. 베로니카 할머니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았고, 이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순교자들의 삶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는 여우목
성지가 있다. 천주교 안동교구 문경성당
2. 자료인용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따라왔던 지리참모 두사충
(杜思 忠; 생몰미상)의 이야기가 있다.
두사충은 중국 산서성 두릉(杜陵) 출신으로 기주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시 이여송 장군을 따라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군진(軍陣)을 펴는 자리를 보는 임무를 맡아 조선으로 나왔다. 이여송의 일급 참모였기
때문에 조선과 합동 작전을 할 때는 조선 장군들과도 긴밀한 전략 협의를 했다.
그는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부대가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키는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한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서두르다가 벽제관(碧蹄館)싸움에서 대패를 당한다.
패전의 책임이 진을 잘못 쳤다는 이유로 두사충에게 돌아갔다. 그를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때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죄를 면해줄 것을 건의하여 목숨을 가까스로 건졌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갔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나왔다. 두사충은 벽제관 전투의
실패로 죽음에 몰렸으나 예천출신의 약포 정탁 대감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것을 은혜를
갚고자 묘터와 집터를 잡아 두었다고 한다.
그의 목숨을 구해준 약포 정탁의 집터와 묘터에 얽힌 전설이 있다.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명당 명혈을 찾아 다녔다. 오늘날 영남 지방에 ‘두사충 소점지’라는 곳이 많은 까닭은
이 때문이다.
「정탁 대감 때문에 목숨을 건진 두사충은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까 생각하다가 택지(宅地)를
정해주는 것으로 보답하고자 하였다. 여러 곳을 답사하다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호동’이라는 아담한 마을에 좋은 집터를 발견하였다. 두사충은 곧 한양에 있는 약포 대감에게
좋은 집터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집을 지으면 대감과 같은 정승이
세 사람 더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약포 대감은 기뻐하면서 현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평복으로 갈아입고 구종(驅從)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 지자
주막에서 하룻밤 쉬었다. 그때 주막집 노파에게 문경 인심을 물어보게 되었다. 그러자 노파가
하는 말이 “앞으로 문경 백성은 아호동에 정 약포 대감집을 짓는 노력동원을 해야 하므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백성들이 걱정하는 것을 들은 정탁 대감은 집 짓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렸다.」
이는 『약포문집(藥圃文集)』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문집에는 아호동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글이 실려있다. 아호(鵝湖)라는 동 이름은 두사충이 지은 것으로 땅의 형세가 마치 많은 오리
떼가 호수에 내려 앉는 군계투호형(群鷄投湖形) 명당이다. 또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금차낙지형
(金釵落地形)으로 ‘아차(鵝釵)’라고도 한다. 후백제 왕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출생지였다는
금하굴이 여기에 있어 아개동(阿介洞)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묘 터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벽제관 전투의 패전으로 참수를 당하게 될 두사충은 정탁 대감의 구명(求命)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대감의 사후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아주기로 했다. 경북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바깥생달)’ 반송(盤松)이 있는 근처에 조선팔대
명당에 속하는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을 발견하고 두사충이 명나라로 떠나기 전 그 정확한
지점을 정대감을 따라다니는 하인에게만 알려주었는데, ‘반송이 있는 곳에서 백 보 안쪽’이라고
했다.
그 후 정대감이 낙향하여 두사충이 정해준 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 잠시 반송
아래 쉬면서 하인에게 아직도 멀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은 손으로 갈전동 쪽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백보이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뒷발질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대감은 말을 죽여 노송 밑에 묻고는 “나의 터가 아니구나! (非吾之地)”라고 탄식하고
돌아갔다 한다.」
이리하여 유명한 연주패옥(連珠佩玉) 명당 자리는 아직도 오리무중에 싸여 있다. 오늘날까지
전국 지관들이 이 자리를 찾기 위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는 말 무덤과 함께 큰 바위 옆에 수령 600년 가량의 노송이 외롭게 서있다.
두사충과 관련된 풍수 이야기는 이외에도 충청도 진천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이 패하게
되었을 때 또 두사충이 죽게 되었을 때 진천사람 이시발의 건의로 살아나게 되었다는 이와
유사한 풍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며 대구에 있는 본인의 묘터인 모명재에 얽힌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갈전리 아호동은 견훤의 출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두사충이 점지해 준 땅은 정확하게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생달의 무송대(舞松臺)도 마찬가지이다.(by 문경시청 문화재관리담당 엄원식)
3. 소회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비록 찾지는 못했어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욕심의 소치로 보는 것이 타당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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