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화진포•낙산사 여행-3

아름답지만~ 2019. 5. 4. 20:29

④ 이승만대통령 화진포기념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이승만별장길 33]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 있고,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양연조옹라(梁鷰嘲翁懶) 집제비는 게으른 늙은 새를 조롱하고

정화소객망(庭花笑客忙) 뜰앞 꽃은 바쁜 나그네를 비웃누나

연조화소리(鷰嘲花笑裏) 제비의 조롱이나 꽃의 비웃음도

각자농춘광(各自弄春光) 각기 다 봄빛을 희롱하는 거라네

언교화여월(焉敎花與月) 봄과 달이

무회우무추(無晦又無秋) 그믐되고 또 가을이 없을 수 있다면

화월장춘국(花月長春國) 영원한 꽃피고 달밝은 봄나라

인무백발수춘일희제(人無白髮愁春日戱題) 사람은 백발의 걱정 없으리라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독립외교 활동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서 1919년 9월 미국의 수도 워싱톤D.C에 외교독립노선을 실현할 기구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승만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상해 임정에

매월 1,000달러 이상의 자금을 송금함으로써 임정활동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한국 친우회’를 조직하였다. 그 결과 1919년 후반부터 미국의회에서 한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여 1920년 3월 17일에는 상원 본회의에 한국독립 승인안이 상정되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921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상정토록 미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이후에도 서방 열강 특히 미국에 대한 외교•홍보 활동은 계속되었다.

미국통 외교전문가인 이승만은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위시하여 윌슨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부인 엘리노어 여사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 등 최고위자와 국무의원들, 국무부와 국방부의

책임자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위해 빈번히 교섭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들 가운데서 노령•상해•한성의 정부가 상해에서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국내 13도 대표들의 국민대회와 270여 명이

체포•투옥되는 과정에서 겪은 한성 정부의 정통성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의정원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민주공화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국내외 동포들에게

1942년 2월, 이승만이 미법무장관 비틀을 설득하여 전쟁 중 적성국가 외국에 부과된 규제의

특별면제대상에 한국교포를 포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법무장관의 성명은 한국인을

일본과는 다른, 해방되어야 할 실체로서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뒤이어서 6월에 이승만은 몇 주간에

걸쳐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국내이 동포들에게 일본의 패망을 예고하는 ‘자유의 소식’을

직접 방송했다. 이 방송은 일제하에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밖에도

이승만은 미국 체신부장관을 설득, 1944년 11월에는 태극기 마크가 그려진 우표를 발행하게 하였다.

대한민국의수립과 선포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조직하고, 해방 만 3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에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의 수립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이 대통령은 기념식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국제친선을 말하며 북한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책임이 소련에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자유민주주의 뿌리, 의무교육제

청년시절부터 ‘교육입국’을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은 6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임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문화적 기반과 국가발전의 기초를마련하였다.

1949년 봄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역사교과서와 국어교과서를 포함한 다양한 교과서가 새로

발간되었다.

경제발전의 기틀, 농지 개혁

농지개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지주와 소작농 관계의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자작농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자유기업 체재의 씨앗을뿌림으로써 1960년대 후

한국경제의 놀라운 발전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했다. 그 때문에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농지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탁•반공 정신으로 시작된건국

1945년 12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여 거국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자율적 정부 수립을 위한 UN외교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1947년 11월 14일,

UN총회에서 남북한 자유선거와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인이 가결되었다.

 

 

 

 

 

북한의 무력남침,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소련과 중공이라는 외세에 의존하여 소련제 탱크와

야크 전투기를 앞세우고 38선을 침입 남침하였다.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국군은 군비(軍備)의 열세로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도 전선을 정비하여

용감히 싸웠다.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력,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적극적인 지원,

미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6월 27일에는 미국이 참전 결정을 내리게 되고, UN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한 군사제재가 결정되었다.

 

 

폐허가 된 나라에 미국의 지원

3년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로 변했다. 2천만 국민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과

기타 생필품,주택,학교 등 부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20개

사단이라는 도저히 감당 못할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러한 군대 유지와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은 휴전협정 후 4~5년에 걸쳐 매년 7억 달러 내외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했고

것은 우리 정부 재정의 73%를 차지했다.

 

교육 대통령 이승만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육성했다.

하와이의 ‘한인기독학원’을 정리한 기금으로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을 설립했다. 또한

해외유학과 함께 단기훈련생과 시찰단 및 국군장병 훈련생을 가능한 한 많이 미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철강과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한 고급인력도 해외로 파견하였다. 따라서 이승만 집권기의

교육 기적은 1960년대 이후에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는 지적 기반이 되었다.

베일 속의 외교관,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외교업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6•25전쟁 기간에는 3개국 말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상을 알려 국제사회의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냄으로써

전쟁수행에 큰 몫을 차지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규탄하는 4•19 학생들의 시위가 경찰 발포에 의해 많은 인명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태로 전개됐다. 뒤늦게 부정선거를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하야를

결심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국민이 내가 그만두기를 원한다면

물러가면 된다‘며 4월 28일 초연히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한국인, 프란체스카 영부인

가끔 지사관저 뒷마당 빨래줄에 때국물이 덜 빠진 남방셔츠가 널려있어도 물이 귀해 손봐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깁거나 올이 다 낡아 구멍이 나기 직전의 빨래들이었다. 너무나 딱한 건 팬츠였다.

헤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노블」참사관이 갖다 준 침대시트를 침모와 함께 밤새껏

말라 팬츠를 여러 장 만들었다. 이 팬츠를 조 지사 부인에게 주어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영부인의 6•25 비망록, 1950년 8월 8일 일기 중에서,,,,

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3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도중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날계란

하나로 때로는 사과 한 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독어•영어•불어와 속기•타자에 능숙했던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박사의

비서로, 독립운동 동지로 그리고 아내의 일인삼역을 훌륭히 감당했다. 하야 후 하와이 체류기간에는

남편의 병상을 지킨 여느 한국 여인처럼 헌신적인 아내였다.

이승만 박사의 별세 후, 5년간 오스트리아에 머물다 영구 귀국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틀니를 하기

위해 3천 달러를 가지고 왔다.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는 며느리

조혜자씨의 물음에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 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묻는 프란체스카여사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이 독립운동 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고 관뚜껑에는

남편의 친필휘호인 “남북통일”을 덮으라고 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한 것이 아니니까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 하던

프란체스카 여사

이 박사 말년의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을 미워하던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몸소

실천했던 그녀는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용서하라! 잊어버려라! Forgive and Forget!"라고 말하였다.

위대한 생애의 마감

1920년 일본이 현상 수배 중임에도 임시대통령으로서 상해를 방문하라는 친구 이승만에게 밀항을

주선해 주었던 보스윅 씨. 관 앞에 다가선 그는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젖히고 이승만의 이마를

짚고는 울부짖었다. "I know you! I know you!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이승만의 하와이 영결식에서

해방 후 70 노구를 이끌고 좌우 이념으로 갈라진 민심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로

단결시키며, 한반도 공산화 음모인 신탁통치와 좌우합작을 극복한 건국위업, 외세를 등에 업은 북한의

6•25남침을 막아내어 자유를 수호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재건에 온 힘을 다했던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체류 중 벌써 90을 바라보며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평생을 바쳐 사랑한 이 민족과 강토를 다시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더 있으면 비행기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귀국길에 나섰다. 그러나 당일 아침

총영사가 찾아와 정부의 귀국만류 의사를 전하자, 충격을 받은 이박사는 그날 이후로 휠체어에서

두 번 다시 일어설 수가 없게 되었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프란체스카 여사와 아들 이인수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박사는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만 90세, 봉건시대인 조선조 말에 태어나 자유롭고 근대화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지켜낸 거목 이승만.  구한말에는 개혁가,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는 자유와

민주의 투사였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이땅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7월 21일, 자신이 설립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사랑하는 제자였으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교민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한국민족의 위인 우남 이승만 박사의 유해는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향해 청명한 하와이의 밤하늘을 힘차게 날아 올랐다.

                                                      4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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