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성따라:
산성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시간이 11시 20분이라 이른 점심을 먹고 산행하기로 해 메뉴를 찾아보다가 곤드레밥이
눈에 띄어 ‘동문집’으로 들어가 맛있게 먹고, 동문을 향했다.
동문집은 남한산성 공영주차장에서 34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쪽 길건너에 있다.
해공(海公) 신익희선생(申翼熙先生)동상 국가보훈처지정현충시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지광”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 촉성국민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지청천의 대동청년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향년 63세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동문까지 걸으며 중간에 있는 시설, 표지안내판을 담았다.
흔남 중의 흔남 서흔남 “보통사람들의 롤모델 서흔남”
『조선왕조실록』중 인조실록에는 병자호란 기간에 장군이나 관리가 아닌 일반인에 대한 매우 특이한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흔남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연락병으로 자원하여 각종 신분으로
변장해가며 외부로 드나들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 등의 연락책을 담당했고, 청군의 진영을 염탐하여
급박한 경우에는 적병을 암살하기까지 했다는군요. 마치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입니다. 수어청을 포함한
조선의 5군영은 상비군과 인력을 모집했는데 모집재상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으며, 동시에 공을 세우는 경우 면천의
특혜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활약 덕분에 실제로 면천이 되었고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벼슬을 받아 무려 당산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서흔남의 이런 행보는 일반백성의 귀감이 되었고
서흔남에 관한 여러 전승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서흔남을 기리는 묘비가 남아있으며
광주시는 이를 향토문화유산 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동문은 광주서 들어오는 도로 보다 높게 위치하고 동문 안쪽에 장경사로 향하는 길도 있다. 동문 옆으로 난
좌측 계단은 몹시 가파랐고 10여 분만에 송암정터 간판이 보인다. 올라온 성곽길을 뒤돌아 보면 흐름이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 숲 사이로 지나온 동문도 숨바꼭질 하는 듯하다.
산성길은 완만한 듯 오름이 이어지다가 내려서며 장경사의 주차구역이 넓어지며 제1암문을 지나고, 장경사를
지나쳐 약5분 정도에 제2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거느린 듯하다. 장경사신지옹성은 잘 복원되어 있었고
가운데 그리 오래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었다.
제 1암문(장경사 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다른 암문들은 좌우측의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을 돌출시키지 않았다. 전체적인 모양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넓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암문을 나가 제 16암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 2암문(장경사신지옹성 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이다.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폭이
1.3m, 높이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된 11개 암문 대부분이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 6암문과 이 암문은 윗부분이 ‘ㅡ’자로 만든 평거식
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완성 축조시 함께 만들어 져 사전에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이곳을 지나치며 완만한 오름은 이어지는 좌측에서 군포지를 만나고, 군포지를 지나며 성 내부에 축대가 있고
이곳이 동장대터이다. 이곳에서 본 여장은 봉암성과 한봉성으로 이어지는 성곽이며 아직 복원되지는 못했다.
제3암문을 통해 봉암성을 30여 분 돌았는데, 그곳에 외동장대터도 있었다.
남한산성 군포지(南漢山城 軍舖地) 사적 제 57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번지 일원
군포(軍舖)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哨所)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1848)」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軍舖)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 군데의 군포도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터(軍舖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平坦)한 내지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礎石)과 벽체(壁體), 그리고 다수의 와편(瓦片)과 조총탄환(鳥銃彈丸)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軍舖)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벽(土石壁)을 돌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정비 시에 발굴된 발굴시의 건물유구를 잘 보존하기 위하여 유구 위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기존 유구와
같은 형태의 모조초석(模造礎石)을 설치하였다.
제 3암문(봉암성 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나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여장(南漢山城 女墻)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平女墻)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여장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성부는 전돌을 사용한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이나, 급경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하였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완총안 2개등 3개의 총안이 있고, 여장과 여장 사이에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된다. 여장의 크기는 길이 3.8m, 높이 1m, 폭 0.8m내외가 일반적이다.
한봉갈림목 이정표[←한봉(漢峰) 1.3km,←노적산(露積山) ?km,→위레둘레길(북문) 1.8km,
↓벌봉(蜂峰) 0.2km,↓위레둘레길(샘재) 7.1km]
제 3편으로 이어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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