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옆 화지산(해발 48m)은 백제 5천 결사대상을 충혼탑으로 하고 있으며, 백제 말기
도읍이었던 부여의 궁궐 남쪽에 당시 별궁 연못인 궁남지가 있고, 그 동편으로 화지산이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화지산 일원에는 백제 이궁지(離宮地)인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물지,돌덧널무덤,목책시설 등 백제시대 뿐만 아니라 청동기 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았으나 패망국의 유적이 얼마나 찾을 수
있을지는 세월이 상당히 흐른 뒤에야 판명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동요비(薯童謠碑)
여기는 옛 백제서울 사비의 궁남지이다. 삼국유사에 이 남지가에 살던 과부가 못의 용과 사랑하여 낳은 이가 서동이며 나중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마를 캐어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 사람이 맛똥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이때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공주 선화(善化)가 예쁘다는 소문 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들어가 마로써 아이들을 꾀어끌어 자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서동의 노래는 무심한 아이들의 입을 빌어 온 서라벌 장안에 퍼진 끝에 신라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조정의 백관은 노래의 내용을 문제 삼아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게 하였다. 귀양가는 도중 서동이 공주를 배행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다. 당초 서동이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가 서동요로서 현존하 는 향가로는 그중 오랜 노래이다. 현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남아있는 서동요는 향찰식 표기로 되어 있 으나 그 대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 맛똥방을 남 그윽히 얼어두고 밤에 몰래 안고간다. 이리하여 서동은 선화공주와 같이 백 제에 와서 나랏사랑의 신망을 얻어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한다. 가난하되 슬기로운 무명의 소년이 미모의 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고 더업시 높은 임금의 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하는 서동의 이야기 를 통해 백제인의 낭만을 되새기고 후대에 기리고자 여기 서동요의 노래를 풀어 돌비에 새기고 그 뜻을 기록하노니 뜻있는 이 걸음을 멈추고 이곳 남지 변 옛 자취를 눈앞에 그리소서
문학박사 황패강이 글을 짓고 문학박사 김동욱이 글씨를 쓰고
부여군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공동으로 세우다. 1987년 5월 일
부여 군수리 사지(扶餘 軍守里 寺址) 사적 제44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1외
부여 군수리 사지는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 사비시대 절터로 확인되었으며 발굴조사 당시 절 이름이 새 겨진 명문와 등이 출토되지 않아 마을 이름을 따서 군수리 사지로 부르게 되었다.
목탑과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이치하고 강당 좌우와 동회랑 외곽에 부속건물지가 배치되는 1탑 1금당의 가람형식이다. 금당과 강당의 기단은 기와조각을 옆으로 뉘어 쌓은 와적기단(瓦積基壇)으로 백제 사비시대 건물터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건축기법이다.
대표적인 출토유물로는 목탑지에서 출토된 보물 제329호 부여 군수리 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330 호 부여 군수리 사지 금동미륵보살입상 등이 있다.
위는 목탑지이나 설명문 이외는 잔디(?)밭 만이 반기고 있다.
구드레 선착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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