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황새바위 순교지와 StartFragment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 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 르는 해발 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 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 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630)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 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충 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1624)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 왕궁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 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공산성을 정리해 올림니다.
1>금서루(錦西樓) 입구(入口) 비석군(碑石群), 2>목사(牧使) 김효성 비(金孝誠 碑), 3>제민천교 영세비(濟民川橋 永世碑), 4>금서루(錦西樓), 5>백제건물지(百濟建物址), 6>쌍수정(雙樹亭),7>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9>연못(蓮池), 10>진남루(鎭南樓),11>십이각건물지(十二角建物址), 12>임류각지(臨流閣址), 13>강당지(講堂址), 14>장대지(將臺址),15>임류각(臨流閣), 16>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17>광복루(光復樓),
18>만아루지(挽阿樓址),19>영동루(迎東樓), 20>영은사(靈隱寺), 21연못(蓮池), 22>만아루(挽阿樓),
23>잠종냉장고(蠶種冷藏庫),24공북루(拱北樓), 25>공산정(公山亭),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 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 르는 해발 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 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 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630)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 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충 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1624)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 왕궁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 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₁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 誌)」₂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₁ 문루: 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
₂ 공산지: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충청도 공주목(지금의 공주시)의 읍지(한 고을의 문화,풍속 등을 기록한 책)
공산성 백제 목곽고(公山城 百濟 木槨庫)
백제 목곽고는 식품이나 물품 등을 보관하기 위해 백제시대에 나무로 만든 지하 저장 시설이다.
목곽고의 위치는 공산성 왕궁 터 서북쪽이며, 윗부분은 가로 4.6m에 세로 4.2m인데 아랫 부분은 가로 3.8m에 세로 3.3m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습이다.
목곽은 네 모서리와 긴 벽에 각각 1개씩 모두 6개의 나무 기둥을 박고 기둥 바깥으로 두께 3~5cm, 너비 13~15cm 이상의 두꺼운 나무판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목곽고 안에 기와가 많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목곽고 위를 기와지붕으로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 한 형태의 목곽고는 백제 사비 시기의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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