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원장 손정도(孫貞道)의 묘(1872. 7.26. 평남 강서~1931. 2.19.)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후 1910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12년 일본인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14년 석방되었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4월13일에는 이동년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후 지린(吉林)으로 가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원장 이강(이강)의 묘(1878<고종15>평남 용강~1964.10.13.)
한학을 수학하다가 기독교감리회에 입교, 공립협회(共立協會),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고, 해조신문(海潮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창간 편집장을 맡았으며 안중근 의사와 연락, 의거가 성공했을 때 영국인 변호사를 선임, 후에 일본영사관의 외교적 압력으로 정간되자 치타로 가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상하이로 가서는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운동을 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부의장, 의장 등을 역임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6년 귀국후 흥사단 심사부장, 평안남도 도민회 부회장, 계명의숙(啓明義塾)이사, 남산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애국지사 서재필(徐載弼)의 묘/ 배위 광산 김씨 합장
전남 보성에서 1864(고종1) 태어났으며 1951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며,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대구(大邱),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 순국선열 이회영(이회영)의 묘/ 배위 이은숙 합장
조선 한성부 저동(苧洞)에서 1867. 4.21.태어났으며 1932.11.17. 옥사하셨다.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제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 사돈 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
※ 강혜림(姜惠林/ 1925~1951)
중국 화교로서 평양에 거주하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자진하여 제1사단15연대에 종군하여 적진정찰 및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51. 2. 2. 경기도 과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59. 6. 1.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고 1964년 24번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그의 공을 후대에 길이 계승하고 널리 알리고자 2012년 5월15일 12번 묘역으로 이전하였다.
※ 위쉬팡(魏緖紡/ 1923~1990)
신의주에 거주하는 화교로서 자유중국군 대위로 근무하던 중 국공내전에서 자유중국이 본토를 대만으로 철수, 만주지역이 공산화하자 신의주로 귀향, 평양근처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한 후 한•중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50년10월 국군 평양 진격시에는 보병 1사단 수색대에 편입, 적정수색과 첩보활동을 하고 중공군 포로심문 등을 실시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휴전 후에는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진료, 장학사업 등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하다 1989년 6월25일 운명하였으며 1990년 3월20일 제12묘역에 안장하였다.
※ 프랭크 W. 스코필드(石虎弼/ 1889~1970)
영국계 카나다인으로 1916년부터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탑골공원 시위광경 및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의 현장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70년 사망하여 애국지사묘역 96호에 안장되었다.
14•15묘역과 16•17묘역의 사잇길을 지나니 유명인사(?)들이 맨처음 뉴스에서 이곳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곳, 현충문을 지나 현충탑에 이르러 우리들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현충탑 안의 위패를 모신 곳을 다녀서 정문을 나섰다(12시27분)[2시간22분 산책]
※ 현충탑(顯忠塔/ Memorial Tower)
이 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으로서 민족의 성역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위와 위훈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탑입니다.
탑의 내부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자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 4천여 위의 호국용사를 위패로 모시고 있고, 탑내 중앙에 위치한 영현승천상 아래 지하 봉안실에는 유해는 찾았으나 개인별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약 7천여 용사들의 영현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탑의 왼쪽 동상은 애국투사상이며 오른쪽 동상은 호국영웅상입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은 단정한 차림과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 현충탑으로 고~, 아래: 호국영웅상
위: 애국투사상, 아래: 영현승천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위패만을 모시고 있는 명단
2. 뒤풀이: 버스로 한 정거장이라 걸어가기로 합의하고 반포주공 아파트를 지나 한 음식점을 찾고 김치찌개 등과 소주를 돌리며 배불리 먹었다. 오늘 식사비는 대한수의사회의 회장인 김옥경 동문께서 찬조해 주셨습니다.
3.참석 동문: 윤시한(54),최원식(55),김중권(59),이병동(60),유재설(61),박해병(62),허원(64),
김옥경(68),김영기(68),박세원(69),박노운(69) 11명
입구 근처의 평화통일나무와 오늘의 참석자(1명은 사진사로 빠짐)
끝까지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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