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북한산 둘레길(6일부,7,8,9,10구간)-3

아름답지만~ 2014. 6. 23. 20:59

둘레길 표시를 따르다보니 은평마을 5경인 태극기비가 서 있다. 이 비는 진관사 입구에 있으며<←삼천사입구0.5km,↑진관사0.5km,↓불광중학교3.3km> 진관사는 은평마을 2경이며 삼천사는 3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5경 태극기비: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문류의 발행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확보한 자료로 추정됩니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됐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습니다.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6월에서12월까지 중국과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아 2010년 2월25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등재되었습니다.

진관사 입구에서 좌측의 석축길을 내려서니(38개) 은행나무가 밀식된 곳이고 무엇에 쓰이는 용도인지 돌무더기가 가지런히 무리(3개와 4개)지어 있다.

곧이어 9구간인 마실길 아치가 있고<↙진관사입구0.3km,↘삼천사입구0.2km>, 넓은 터와 음식점들이 즐비하지만 몇사람 만이 대낮 음주를 하고 있다. 삼천사 입구를 지나고 ‘연서로’ 옆의 하천데크를 지나니 10구간인 내시묘역길 아치가 있고 그 뒤로 울타리를 친 조경수들을 관리하는 농원들이 즐비하게 이어진다. 잠시후 북한산로로 나와 순두부와 탁주 2병을 게눈 감추듯 하고 떠나 여기소터 비가 있는 여기소마을 경로당을 지나고 백화사 입구<←북한산탐방지원센터0.7km/의상봉1.9km,→여기소마을경로당0.7km>를 지난다.

                                          소공원 이정표와 두 번째의 마실길 구간 아치를 지나면 음식점이 몇군데 있다.

                                                              삼천사 입구 이정표와 하천변 데크길이 열린다.

                                       대로변에 있는 이정표를 따르다가 아래 이정표 10m 이내의 식당에서 한잔 걸쳤다.

※여기소터(汝其沼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곧 여기소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울타리를 친 좌측이 내시묘역인 듯 하다. 조금 지나니 경천군송금물침비를 지나니울타리 안에는 폐가가 보기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고 5분여 후 북한산탐방지원센터<↙여기소마을경로당1.4km,↘밤골공원지킴터3.5km>를 만난다.

                                                  의상봉을 바라보며 동네길을 걸었고, 백화사 입구의 이정표

                                            좌측 울타리 너머에는 내시묘지가 있겠으나 둘레길에서는 안보인다.

※경천군송금물침비(慶川君松禁勿侵碑)의 역사와 문화

◦소재지: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산6번지 일원 ◦소유현황: 비문화재(慶州李 경천군파 사유재산)

송금물침비는 북한산둘레길 중 내시묘역길(현지점) 구간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일본과의 화평교섭에서 크게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경천군(慶川君)으로 봉해진 이해룡(경주이씨)의 사패지(임금이 하사한 토지)이자 그 주의사항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나라의 모든 토지가 왕의 것이었기에 공이 있는 신하 등에게 땅을 주거나 땅에서 나는 땔감 등의 생산물을 거두어 갈 수 있게끔 하였는데, 바로 이 비석을 통해서 사패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석 앞면에는 ‘경천군에게 내려준 이 땅(무덤)에 함부로 들어가거나 소나무를 베지말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뒷면에는 1614년10월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만력42-1614년 갑인 10월)이 남아 있습니다. 경천군 이해룡은 한석봉과 함께 당대의 명필로서 사자관(寫字官)을 담당했으며, 임진왜란을 즈음하여 통신사의 일행으로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난 곳 이정표<←밤골공원지킴터2.9km,←백운대4.0km,↘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0.1km,↑백운대4.2km>와 전주이씨(全州李氏)해안군파(海安君派)서흥군(西興君)묘소 석비가 있고 둘레교로 들어서서 북한산의 원효봉(505m),백운대(836.5m),만경대(799.5m)와 노적봉(716m)이 보인다는데 나무가 많이 자라서인지 만경대와 노적봉 만이 보인다. 송림 사이의 데크길을 따르니 우측으로 울타리를 친곳 안에 묘소들이 잘 꾸며져 있고 꽤 넓은 면적이 울타리를 둘렀다.

※전주이씨 서흥군, 위성군 묘역: 이 묘역은 조선조 제11대 임금이신 중종대왕(中宗大王)의 제2왕자 해안군(海安君 )의 차남이신 서흥군(西興君)의 묘소이며, 서흥군의 아드님이신 위성군(渭城君)의 묘소 및 그 자손들의 묘역입니다.

해안군<시호: 정희 靖僖, 일명: 이희 李䖷 1511~1573년>은 중종과 어머니 숙의 남양 홍씨 사이에 태어나 1519년(중종13) 9세 때 해안군으로 봉군 되었습니다. 해안군은 평소에 과묵하고 행동이 올바르며 특히 음주를 하지않고 용모가 단정했습니다. 부왕인 중종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나의 아들 중에 가장 침착하고 삼가 들떠 있지 아니함에 해안군 같은 아이가 없다”고 했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고 매 날리기와 말타기를 좋아했던 해안군은 1540년(중종35)에 종부시제조(宗簿恃提調)가 되고 1549년(명종4)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으며, 이어 사옹원•문소전(文昭殿)의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하였습니다. 아들은 서릉군(西陵君)•서흥군(西興君)•오천군(烏川君)•오산군(烏山君)•서천군(西川君)•오강군(烏江君)이 있습니다. 

                                                                                                全州李氏海安君派西興君 宗中

이곳을 지나니 길가에 망초대가 꽃을 만개하고 효자농원<←밤골공원지킴터2.7km,→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0.8km,↗원효봉1.6km>에서 4년 여전 원효봉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지인을 생각해 보고 11구간인 효자길 아치를 지나 효자리 입구로 나와 길을 건너서 관세농원(버스정류장)에서 둘레길 산행을 마친다.

                                     원효봉을 당겨보고, 효자길 입구가 반대에서는 내시묘역길이다. 오늘 끝맺음에 만세

5. 돌아오기: 버스(704번; 15시55분)-구파발(16시11분,③전철;16시16분)-충무로(16시40분,④전철16시46분)-사당(17시10분, 7770번 버스;17시19분)-수원(17시47분) [총 소요시간 1시간52분]

6. 에필로그: 오늘 걸었던 거리는 12.6km이다. 긴 시간(5시간46분)을 더운 날씨에 걸을 수 있었다는 건 최소 3구간은 걸으리라 마음 먹었었고, 갈증을 해소할 겸 활력을 충전하는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의 덕일 것이다. 나와 아내가 걷기에 취미가 남보다 더했기에 언제나 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수원에 내려와서는 메밀국수로 저녁까지 해결하고 돌아오니 천국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역사의 한토막을 담아낸 구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11,12구간과 15구간의 3km를 주파하면 북한산둘레길은 모두 돌아보게 된다. 금년 중 모든 일들이 처리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좌로부터 인수봉,백운대,원효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