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우회의 오랜 역사는 회원들의 년륜을 끌어올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하건만 임원진들은 열심히 준비하고 연락해 많은 인원이 함께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모임이다. 모처럼 야외로 향하는 발걸음을 위축들게 하는 비 소식에 다소 움추러 들지만 수원은 개인 날씨다.
해인사는 불교의 삼대 사찰 중의 한 곳인 법보사찰이다. 근래는 이성철 대법사의 사리탑이 있고,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이다. 해인사의 뒤로는 가야산(해발 1,430m)이 주산으로 있으며 주봉인 상왕봉은 일명 우두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해인사의 앞자락을 굽이쳐 도는 홍류동 계곡은 아름다운 바위와 홍송이 장장 10여 리로 이어져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1. 다녀온 날; 2015년 5월 3일 일요일 07시~
2. 행선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3. 가는 길; 수원 북문농협(07시02분)-1번국도-북오산 나들목(07시25분)-400•1 고속도-안성휴게소(07시42분~08시09분)-1•30•45 고속도-선산휴게소(09시43분~54분)-45 고속도-성주 나들목-33국도-수륜면 삼거리(10시37분)-59국도-야천삼거리(우회전)-해인사 시외터미널 인근(11시16분) [4시간 14분]
4. 상세여정; 긴 거리의 여행은 차내 음주는 필수적이다. 그렇게 4시간여를 달렸는데 우리의 행선지가 비를 맞이하러 간 꼴이 되었다. 갈 때의 휴게소는 비가 내렸고, 식당으로 갈 때는 제법 비가 내렸다. 식단은 산채한정식(13,000원)이라며 경상도 답지않게 심심하고 소박해 보였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해인사를 향하는 길 내내 빗줄기가 거세다. 홍류동 계곡은 오랜만에 물을 만나 탁하지만 거센 물줄기를 이어가고 자동차 길에 흐르는 물은 인도교를 걷는 우리들에게 물보라를 선사한다. 15분여 후에 좌측으로 이어지는 해인사 입구는 퇴직수의사 모임에서 다녀간 추억의 길, 질척거리는 날씨가 못내 서운하지만 간략하게 돌아보고자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쇼핑센터를 지나고 성보박물관을 지나서 홍류동 계곡을 건너고 이어지는 산책길을 따라서 국제화장실도 지나 해인사 입구인 당간지주와 원표를 지나고 이어서 일주문(伽倻山 海印寺란 현판이 붙어있는)을 통과하고 우측의 고사목을 지난다.
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 밖 동남쪽으로 약 50m 되는 곳에 있다. 이 탑은 오랜 내란으로 해 인사 주변에서 전몰한 승려와 백성을 위해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빌고자 해인사의 훈혁 스님이 895년에 세운 위령탑이다. 전형적인 신라 계통의 3층 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다. 1966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 은 탑지(塔誌), 157개의 소탑 등 유물이 나왔다. 이 탑지는 당시의 사회 상홯과 탑의 건립 내력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사목(枯死木): 이 나무는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 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두 스님이 수행하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 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 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나타난 집은 해인총림(海印叢林)이란 간판이 붙어있고 양켠은 공간이 있는데 무엇을 기원했는지 1천원 짜리 지폐가 꽤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분명 이 공간이 사천왕상이 있을 곳이다. 또다른 건물이 가는 길목에서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란 건물이 버티고 있는데 그 안에 해탈문(解脫門)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며 좌편의 구광루(九光樓)란 건물을 지나니 수행 및 예불공간인 대적광전 앞이다. 이곳에서 기와불사를 한다. 우리 가족과 사위 그리고 외손주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대적광전을 우회해 팔만대장경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문을 향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접근도 못하게 줄을 띄운 장경판전을 돌아 포토죤으로 만든 곳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본 것으로 대신한다.
[고려팔만대장경판 대장경판 국보 제32호/장경판전 국보 제52호/고려각판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고려팔만대장경판은 글자를 새긴 경판 판면과 경판 양 끝에 각목으로 덧댄 마구리로 이루어져 있다. 마 구리를 포함한 경판의 가로 길이는 약 70cm, 세로 길이(폭)는 약 24cm, 두께는 약 2.8cm이고, 무게는 약 3.25kg이다. 글자는 경판 양면에 돋을 새김(양각) 되었다. 한 면에 글자를 새긴 세로줄 수는 23행이 며, 행마다 새긴 글자 수는 14자 정도이다.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인류 최대의 기록물이다. 약 240여년 동안 3차에 걸친 고려대장경 판각은 불교를 꽃 피우게 하였고 인쇄문화 와 기록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여 아시아 문화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이는 정신문화사적으 로도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어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고려대장 경판은 해인사의 다른 경판과 함께 2007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금 간 곳에 있는 학사대를 거쳐 가려니 길이 막혀 다시 대적광전 앞으로 해 나오다가 일행을 만나고 올라올 때의 길이 아닌 곳으로 돌기로 하고 금선암을 거치고 삼선암을 지나는데 속이 않좋아 부리나케 국제화장실까지 가 용변을 보고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렸던 근처까지 가서 일행이 모두 타기를 기다리고 연락되어 해인사를 떠난다.
위는 금선암의 법당 현판이 보이고, 아래는 삼선암과 홍류동 계곡물
학사대는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운(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서(詩 書)에 몰입하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두었다고 전해지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지 가 아래로 쳐져 거꾸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5. 돌아오는 길; 갈 때의 역순, 버스(14시10분)-59•33국도-성주 나들목-45고속도-선산휴게소(15시48분~16시02분)-45•30고속도-문의휴게소(17시02분~14분)-30•1고속도-천안휴게소(17시44분~56분)-1고속도-북오산 나들목-1국도-만석골식당(19시50분~)[5시간40분]
6. 에필로그; 젊은 기사(엄성민)는 차분히 버스를 몰고 그 긴 시간을 들여 산채정식을 먹으러 해인사를 다녀 온 꼴이다. 아무턴 놀이문화에 술이 빠질 수는 없으나 긴 시간의 주행이 자연스레 과음이 되고 그게 뒤 끝에 추태가 나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꼭 감정이 있어서라기 보다 정신이 혼미한 속에서 당장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다. 나눠주는 것도 많고 먹기도 많이 먹었으나 저녁까지 먹고 마무리를 지으니 댁내 아주머니들은 횡재 수일 것이다.
'국내 여행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여행 1. (성흥산성, 대조사)-1 (0) | 2015.10.13 |
---|---|
충주(忠州) 루암리(樓岩里) 고분군(古墳群) (0) | 2015.09.14 |
중앙탑 주변 둘러보기 (0) | 2015.01.15 |
탄금대 주변 둘러보기 (0) | 2015.01.15 |
구미로의 여행-3 (0) | 201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