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

백두산 여행-3

아름답지만~ 2015. 9. 1. 15:54

3. 여정: 731; 그리오래지 않은 비행(2시간13)으로 목단강 공항에 도착했는데 차창에 비친 비행장은 무수한 전투기(MIG)들이 포장재로 덮인체 비상대기 중이었고, 시설은 매우 단조로웠다. 우리는 단체비자를 발급 받았기에 세 팀으로 나뉘어 순서대로 입국심사를 받은 후 공항에서 5일간 함께 할 가이드 박금화(교포 3; 충북 제천)를 만나 인사한 후 버스(운전기사; 장따거/중국식)에 올라 목단강나들목을 거쳐 G10 고속도로로 동경성나들목으로 빠져나와 발해상경유지박물관(渤海上京遺址博物館)이 있는 옆의 건물 식당(사해취대반점<四海聚大酒店>)에서 식사를 마치고, 발해의 유적지인 궁성지로 향했다.

                                                                      만주벌판 어디쯤을 비행기는 날고, 사해취대주점의 상차림

발해상경유지박물관(渤海上京遺址博物館): 빈 터만이 잡초밭인 이곳, 자료 찾아 3만리도 아니지만 드디어 찾은 문구(광주매일신문; 2007.08.31.)에 의하면 당시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문은 초등학교 교실만한 전시실 2개로 구성된 박물관에 기와와 토기불상 등 100여점의 유물과 상경성을 복원한 모형 등이 있지만, 빈약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안내문에 중국지방정권의 하나로 기술해 놓았다.’

 

우리 땅에 있었다면 이렇게 홀대 받지는 않았을 역사유적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미는 노릇이다. 초라하더라도 건물이 있었다면 오늘 잡초만 차지한 빈터 보다는 낫지 않았으까하고 생각해 본다. 식당에서 멀지않은 궁성지가 가까워지면서 넓은 백일홍 꽃밭이 보이고, 허름한 시설의 매표소를 지나 버스에서 내리니 조금 떨어진 곳, 앞으로 남문터와 성벽이 버티고 서있으며,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옛 우물(古井)이 있다. 성벽 앞 화단의 백일홍이 만발한 앞에는 세계문화유산 석판이 있다. 이 꽃밭들은 절기마다 꽃을 바꿔 가꾸는 모양이었던 듯 다른 계절의 블로그에는 다른 꽃들의 사진이 같은 곳에서 첨부되어 있었다.

 

                                                                                          궁성지 앞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들어간다.

 

 

 

발해 상경용천부 유적지는 경박호 동북쪽 약 20km 떨어진 영안시 발해진에 있다. 1960년 대까지만 해도 발해진은 동경성진에 속하는 촌락이었는데 그 이후 떨어져 나와 2만여 명의 독립된 진()이 되었다. 그 중에서 조선족은 30%쯤 된다. 동경성진과 발해진과의 거리는 5km 가량 떨어져 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함께 세운 나라로 698년 육정산 근처에 성을 쌓고, 대진이라는 국호로 발해를 건국했다. 현재 발해진에 있는 상경용천부는 서기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리고 성왕시기인 794년에 수도를 풍경용원부(지금의 훈춘지역)로부터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겨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132년간, 모두 162년 동안 발해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다해 왔다.

                                                                            옛 우물이라지만 설명문 없고 지금도 정원관리수로 사용되는 듯

 

                                                                                               궁성지 석비와 남문지 성벽위의 주춧돌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행정구역을 51562주로 편제하였는데, 상경용천부는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의 5경 중 하나이다.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떠서 만든 도시의 구조와 규모를 설계해 만들어진 장방형의 계획도시이다. 상경용천부는 외성(外城; 羅城)내성(內城)궁성(紫禁城)으로 구성된 3중 구조로 만들어 졌으며, 성터는 목단강이 북쪽과 서쪽을 에워싸고 있다. 외성은 동서 4,650m, 남북 3,530m의 긴 장방형에 높이 4m의 아래에 돌로 판축을 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았다. 외성 안에는 4.5km 규모의 내성을 둘러쌌으며, 그 안에 궁성(宮城; 둘레 2km))이 있었다.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는 중대성첩이 소장돼 있다. 841년 발해 중대성이 일본의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것으로 발해와 일본 사이에 왕래한 외교문서였다. 발해는 신라와 5 차례, 일본과 34 차례, 당과는 100여 차례 넘게 교섭하는 등 주변 여러나라와 외교관계가 활발했었다.(by 광주매일신문,국제신문 발췌인용)

 

 

                                                                                      궁성남문지의 현 모습과 안내글 그리고 궁성 배치도

 

 

                                             궁성동랑폐지를 지칭하며 꽤 많은 주춧돌이 있는 규모가 대단하게 커서 발해의 위용을 느낄만 했다.

이렇듯 거대했던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던 발해가 서기926년까지 건재하다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하나 백두산의 화산폭발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으며, 이후 고려나 조선과는 거리가 먼 남의 나라 영토가 되었음은 발해의 멸망이 주는 교훈은 무어이라 하겠는가? 신라의 섣부른 통일이 국토를 위축시켰으며, 외세의 힘을 부른 통일은 또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발해의 국토가 통일된 신라의 국토보다 넓었으니, 때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일까마는 곱씹어볼 일이다.

잠시 이동해 들린 흥룡사(興龍寺)는 넓은 주차장에서 산문으로 들어서자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에게 붉은 천을 공양하기를 바라며 불자인 듯한 여인네가 붉은 천을 권한다. 붉은 천을 부처에게 공양한 후 공덕함에 보시를 넣고 뒤의 건물인 관성전(關聖殿)에는 관우(關羽)가 좌우로 유비(劉備)와 장비(張飛)를 대동하고 모셔져 있다. 그 옆건물 천왕전(天王殿)에는 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달마상도 있고, 대웅보전의 부처는 우리나라의 부처가 앉은 자세이나, 이곳에서는 기립(起立)자세로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뒤편에 석등(石燈)이 있으며 그뒤로 삼성전(三聖殿)에는 커다란 석불(石佛)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 흥용사와 삶을 같이 했다는 고목과 옛 우물이 자리했다. 박물관(博物館)이 있다지만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그대로 나와 버스에 오르고 이도백하를 향해서 출발한다.

                                                                                              주차장에서 흥륭사 입로 가다가 잡은 흥륭사 입구

                                                        누군가가 함풍11년에 세운 석비, 관성전의 내부를 일행들이 들여다보고 있다.

                                              달마상의 배는 복을 부른답니다. 1000년 이상 되었다는 고목이 삼성전 동북방향에 있다.

흥룡사는 석불이 있다해서 석불사(石佛寺)로 불리어 온 발해시대의 절터였는데, 그 기초만 남아 있다가 청대(凊代)에 들어와 흥륭사(興隆寺)라는 절을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861년에 중건된 다섯 채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모두 상경성 발굴에서 나온 각종 유물들을 진열하고 있는 발해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등은 원래의 높이가 6.4m이지만 지금의 높이는 6m이다. 기둥돌 아래와 위에 연꽃 무늬 받침이 새겨져 있으며, 용암을 이용하여 8각평면의 정자형식을 따서 만든 석등탑은 받침대 위에 배부른 기둥이 세워지고 기둥 위에 연꽃 모양의 받침돌이 놓여 있으며 정자형 등실 꼭대기는 일곱층으로 돌아간 머리치레로 되어있다.

                                                                                                   석등과 그 뒤로 삼성전이 보인다.

                                                  청나라시대에 사용했다는 옛 우물, 흥륭사 입구로 발해유물전시관의 간판도 붙어있다.

석등 바로 뒤에 있는 삼성전(三聖殿)안 한 가운데는 발해시대의 거대한 석불(石佛; 높이 3.3m)이 봉안되어 있다. 연꽃 모양의 보련대에 3개의 돌로 몸체와 두 무릎을 새기고 두 무릎을 몸체에 끼워 맞추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늠름한 체구에 자애로운 모습,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옷주름이 실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발해 불상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크기가 줄어들고 머리도 떨어져 더 이상 발해의 석각 예술로 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흥륭사 석등은 많은 전설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문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초에 한 석공이 홀한해(경박호)에서 커다란 돌을 옮겨와 백일 동안 정으로 쪼아 석등을 만들어 불을 켜놓고는 갑자기 돌기둥 속으로 사라졌다는 내용, 돌이 갈라 터질까봐 자신의 몸으로 껴 안았다는 그 석공 덕분인지 오늘 날까지도 석등이 거연히 솟아있다. (by 좋은 벗들 카페 인용; 2006.09.20.)

                                              관음전 안의 관세음보살과 관성전 안의 관우와 유비, 장비의 모습(중국에서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많음)

                                                          천불전의 많은 부처가 모셔져 있으며,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을 위시해 약사불,아미타불

                                                       석등 앞에서 일행의 인증도 하고, 석불은 웬지 석굴암의 석불과 일맥상통한다는 분위기

                                                백두산여행 3부를 마침니다. 4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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