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우기

충주의 장군과 의병장 찾아보기

아름답지만~ 2015. 12. 10. 08:23

 

충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찾아본 유적지, 그 첫 번째가 임경업장군이었고 임진왜란시 구국의 일념으로 나섰던 장군과 의병장 두 분을 찾았었다. 그 큰 뜻을 상기하는 의미에서 한군데 묶어서 정리해 본다.

우리 세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국(憂國)과 구국(救國)의 선조들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라도 배울 수 있었으나, 후학들 일부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그릇된 판단에 의해 학교 교육에서 역사를 빼버리는 우()를 범하였다. 역사를 거울 삼아 살아가는 좌표로 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건만 어떻게 그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갈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택했던 건 아닐런지?

                     평택 임씨 문중의 땅이라 다른 분들의 묘들도 많은 곳, 다소 높은 곳에 임장군의 묘소는 자리하고 있다.

                                                  충렬사에 모셔진 영정과 충렬사 경내의 등나무 쉼터

1)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묘소와 사당

임경업장군은 선조 27년 서기1594112일 충주 대림산 기슭 달천평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광해군 10(1618) 25세때에 무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두루 맡아 선정(善政)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국토방위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남겼다.

인조 2(1624)에는 이괄(李活)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크게 동요되었을 때 장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는데에 크게 공헌하여 진무원종공신 일등에 책훈되어 그때부터 명성을 떨치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주로 평안도에서 국방에 진력하여 검산성 용골성 백마산성 의주성을 수축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였다.

장군은 숭명반청(崇明反靑) 사상이 투철해 명과 통교하였다 하여 청나라로 압송도중 탈출하기도 하고 명나라로 건너가 명군의 힘을 빌어 대항하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18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고, 후에 심기원의 모반사건(1644)에 연루되었다 하여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고 결국 김자점에 의하여 심한 고문 끝에 쉰 셋의 아까운 나이로 장살(杖殺)되었다. 이때가 인조 24년 서기 1646620일이었다.

그후 누명에서 벗어나 조정에서는 숙종 23(1697)에 사당을 세웠고, 숙종 32(1706) 장군에게 충민(忠愍)의 시호(諡號; 죽은 후에 살아 있을 때 공적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를 내렸다. 영조 3(1727)에는 이곳을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주었다.

정조대왕께서도 충렬사비에 임경업장군의 행적을 간략히 적고 그 절륜한 충절을 예찬한 글을 쓴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를 충렬사 경내에 세웠다.

장군의 부인 역시 장군의 아내답게 살다간 여인이다. 청나라로 임장군을 압송도중 놓치자 그의 부인을 잡아 청나라 심양에 있는 옥에 가두고 갖은 고문과 모욕을 주었지만 장군의 아내답게 자결하여 나라에서 부인의 충정을 기려 정렬비를 세웠다. 이처럼 충절이 모함으로 꺽여버린 장군을 뒤늦게나마 옳게 판단하고 기린 점은 어찌보면 이순신장군의 행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장군의 묘소는 충주시 풍동의 높은 산자락에 있고 자리가 매우 좋은 듯하다. 평택 이씨 문중의 종산이라 다른 묘소들도 많이 있어 좋은 자리로 보이지만 후손들이 자주 들려 돌봄이 부족한 듯 하다. 충렬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으며 관리사무소에서 돌보고 있어 단정했고 묘소 보다는 정돈되어 있고 산뜻했다.

충무공(忠武公) 이수일장군(李守一將軍) 묘소(墓所) 충북도 기념물 제21/소재지;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이수일(1554~1632)장군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를 합장한 묘소로, 이수일은 조선 중기의 무장(武將)이며. 이완 대장의 아버지이다. 자는 이순(李純), 호는 은암(隱庵),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선조 16(1583)에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되어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 2)에 올랐다. 그후 성주목사 및 함경도 병마절도사로서 왜적 및 변방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인조 2(1624) 이괄의 난 때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묘소의 서남쪽에는 충훈사(忠勳祀)가 있으며, 그 앞으로는 현종 8(1667)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순창 조씨 묘역의 종중분들 묘소와 당대 이름을 날린 분들도 많은 듯 했다.

                                                      조덕공 의병장 묘역의 원근으로

                              지난 가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다녀온 기록을 다듬어 올려 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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