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장군 유적지(階伯將軍 遺蹟地)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 311-54
[충청남도지정 기년물 제74호]
계백장군은 의자왕대에 성충(成忠), 흥수(興首)와 함께 백제의 삼충신(三忠臣)중 한 명으로, 백제역사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도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결사대 5,000여 명을 이끌고 황산벌에 나아가 신라군 5만여 명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백제군은 지형이 험난한 요충지 세 곳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러나 화랑 관창(官昌)등의 죽음으로 전의를 가다듬은 신라군의 공격에 백제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며, 계백장군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계백장군과 5,000결사대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 후손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1990년대 이후 계백장군 유적지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왔다. 유적지 내에는 계백장군 묘소와 계백장군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위치하고 있다.
◉계백장군 묘(階伯將軍 墓) [지정물: 기념물 제74호,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4, 시대: 백제시대]
백제의 계백장군 묘로 추정되는 곳으로 전란이 끝난 후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였다고 전해 온다. 4~50년 전 묘가 노출되었을 때 철제무기가 나온적도 있다하며, 주위에 충장산(忠蔣山)•충훈산(忠勳山)•수락산(首落山)이라는 지명이 있고, 묘소 일대를 가장(假葬)골이라 부르고 있다.
송림 사이로 충장사가 보이고, 계백장군 묘를 멀리 가까이
※ 방문한 시간이 제법 이른데도 적지않은 차량과 인파들이 점점히 눈에 띄는 곳 계백장군 유적지, 백제를 말할 때면 으레껏 대두되는 이름 ‘계백’, 15~6년 전 탑정호를 남서쪽 도로로 지나 다니며, 이곳 어딘가가 황산벌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어림 짐작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큰 맘 먹고 찾은 거룩한 기상과 비운의 장군인 계백의 흔적을 찾아보게 되었다.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가 아니라 척추협착이라는 조심스런 질환이지만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며 경내를 비교적 차분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백제군사박물관, 계백장군 묘, 충장사와 충혼공원을 거쳐서 돌아보고 주차장에서 싸가지고 온 간식거리로 요기를 한 후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백제군사박물관 입구의 백제군사와 계백장군 묘역
충장사 전경과 계백장군 영정
충혼공원으로 오르다가 본 충장사와 그 뒤로 구릉지 솔숲 사이로 계백장군 묘역과 기마상
3. 논산시 연산면
① 김장생선생(金長生先生) 묘소일원(墓所一圓)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47호]
『김장생 선생의 7대 조모인 양천허씨(陽川許氏)와 그 아들 김철산(金鐵山) 그리고 후손인 김겸광(金兼光), 김공휘(金公輝), 김장생(金長生), 김선생(金善生)등의 묘와 허씨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김장생 선생의 사당, 재실인 염수재(念修齋) 그리고 종가 등 광산김씨 일가의 묘소와 사당, 비(碑)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김장생(1548~1631년)의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어려서는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배우고, 뒤에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우계 성혼의 출입하였다. 15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가 1602년에는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나 관직에 오래 있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문하생인 아들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다.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있게 연구한 예학의 거두(巨頭)로 기호학파(畿湖學派) 학문의 중심인물이었다.
양천허씨(陽川許氏)는 경혜공(景惠公) 양천 허응(陽川 許應)의 따님으로 고려 우왕(高麗 禑王) 3년(1377)에 탄생하셨고 일찍 남편상을 당하신 나이 겨우 17세이셨다.』
쌍계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눈에 띈 이정표를 차를 되돌려 잠시 찾은 광산김씨의 예학의 거두, 기호학파 학문의 중심 인물이 이곳에 유택을 정한 것은 이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의 유적지가 있으리란 호기심을 자극해 여러 곳을 뒤적이며, 그냥 잠시가 아닌 제대로의 김장생선생을 뵈러 와야 될 곳이었다. 먼저 묘소의 배치를 보면 맨 위쪽 곡담이 둘러친 곳에 김장생과 부인 창령조씨(昌寜曺氏)의 합장묘, 바로 아래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 양천허씨(陽川許氏)의 묘, 그 왼쪽 위로 김선생(金善生)과 부인 진주정씨(晉州鄭氏)의 합장묘, 김철산(金鐵山)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 김철산의 묘, 김공휘(金公輝)와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의 합장묘가 있다. 이러한 선후대의 위치가 뒤바뀐 것을 역장(逆葬)이라고 하는데, 김철산(金鐵山)은 어머니 양천허씨보다 5년전에 사망하여 가장 먼저 이곳에 유택을 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장은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地官)의 견해에 따라 명당이라고 보는 자리부터 사망한 순서대로 유택을 정하는데서 오는 현상으로,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묘도 아버지(李元秀)와 어머니(師任堂申氏)의 묘 위쪽에 역장되어 있다. 이러한 역장묘는 지식이 아주 높았거나 입신양명 했을 경우 부모 묘 보다 높은 자리에 쓰는 풍습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철산(金鐵山)은 김장생의 6대조이며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 김공휘(金公輝)는 김장생의 숙부이며 파주목사를 지냈다. 김선생(金善生)은 김장생의 사촌이며 어모장군 총좌위부사과를 지냈다.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金繼輝)의 유택은 북쪽 방향 1.8km(약 6분) 떨어진 곳(고정리 산13-1)에 있다. 계백장군 묘의 동북방향으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광산김씨의 중흥을 일으킨 양천허씨 묘와 조금 떨어진 광산김씨 묘역
4. 논산시 양촌면
① 쌍계사(雙溪寺)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국가지정 보물 제408호]
쌍계사는 논산의 최남단으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점에 작명산(불명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으며, 사찰 이름에서 살필 수 있는 것처럼 두 계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로 추정이 가능해 보인다. 즉 고려초기 광종 무렵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을 조성한 혜명대사(慧明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당시에는 백암(白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는 고려때 행촌(杏村) 이임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by 검색조합 인용>
『 다만 절과 관련된 전설이 지금까지 인근에 널리 전승되고 있어 쌍계사의 역사성과 중요성을 더듬어 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절에 대하여 전승되는 전설을 보면, 옥황상제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절터를 잡아 건립했다고도 하며, 절의 쌀뜨물이 큰길까지 흘러 내려갔다는 내용, 어느땐가 이곳에 피신해 있는 고관을 관군이 잡으러 왔지만 스님이 독경을 하자 침입하지 못했다는 내용, 대웅전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물고 그려주었다는 내용, 대웅전 문의 꽃무늬 문양에 도력이 가미되어 법당 안쪽으로 빛이 잘 투과한다는 내용, 대웅전의 기둥 하나가 칡덩쿨로 되었으며 윤달에 이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오래 앓지 않고 저승에 간다는 내용(칡덩굴나무는 대웅전에 들어서서 좌측 두 번째 기둥), 북소리가 너무 웅장하여 한쪽 가죽을 찢어 냈다는 내용, 이 절의 신령이 공주갑부 김갑순의 자제를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내용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전설 유형이 전승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이 절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더 있어 쌍계사는 마치 사찰전설의 백화점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절의 동쪽 고개 밑에는 이름난 물탕이 있다. 이 샘은 예전부터 약효가 좋기로 이름이 높아 추석 무렵 한가할 때에는 땀띠나 피부병을 치료하고 또 약수를 마시기 위해 양촌면 일대 주민들은 물론 산너머 전북쪽의 주민들까지 널리 모여들어 줄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비가 와도 젖지않는 관세음보살 석상은 1980년대에 조성하여 일타 큰스님이 증명한 아무리 비가 와도 용상(얼굴)만은 비에 젖지 않는다. 30여 년의 세월에 손과 옷주름에는 이끼가 끼어 검푸르지만 용상만은 하얗게 빛나고 있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입구의 봉황루(鳳凰樓)는 공사중이라 오르지를 못했으나, 다른 분들의 자료에서 발견된 글을 올려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봉황루는 북이 있는 누각으로 1779년 한 노승이 쌍계사 봉황루에 올라 지은 한시다.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雙溪寺 鳳凰樓 登樓賦韻)』은 노납(老衲; 납의를 입은 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승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만 알려진 작자가 지은 오언율시의 한시(漢詩)로, 봉황루 현판에 남아 있다.
“고루아독와(高樓我獨臥) 심적상비천(心適上飛天)
<고루에 나 홀로 누워 마음은 하늘을 찾아 오르네>
중수운유백(衆峀雲留白) 군계월영(群溪月影)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구름이 머물고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석등명불실(石燈明佛室) 조우암선비(朝雨暗仙扉)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아침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일상금사지(日賞金沙池) 신망속제귀(身忘俗諦歸)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게하네> “ <by 청현(淸顯)님의 블로그 인용>
대웅전 앞의 넓은 터(입구에서 우측)에는 연리근을 이룬 나무가 있고 절 입구 못미쳐 있는 부도군은 이 절의 역사적 깊이를 방증하는 듯 하다. 분명치는 않으나 혜명이라는 글이 있다고 하니~
『이곳에는 쌍계사에서 입적(入寂)한 고승들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9기의 부도가 현존하고 있다. 그 중 6기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들은 사각형, 육각형의 지대석(地臺石)에 연꽃잎 문양을 조각하여 장식하였고 중간에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놓았으며, 꼭대기에는 구슬모양(寶珠)으로 만들었다. 3기의 네모난 지붕돌(屋蓋石)을 갖춘 방형(方形)의 부도들은 석종형 부도보다 작고, 원형의 몸돌 표면에 장식이 없으며 지붕돌 꼭대기에는 구슬 모양을 조각하였다. 기단부는 하대(下臺), 중대(中臺), 상대석(上臺石)으로 구성되었으며 연꽃문 등으로 장식하였다. 일부 부도에는 판독이 어렵지만 명문(銘文)이 남아 있으며, 그중 혜명대사(慧命大師)의 부도가 있다.』
성삼문 묘(成三問 墓)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88
아기를 낳으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지었다는 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선생이 한강가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당한 후 그 시신을 전국의 산하에 매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에 시신의 일부가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일지총(一肢塚)이라고도 전한다.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령(昌寜)이다. 도총관 승(勝)의 아들로 1438년(세종20)에 하위지와 함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했다. 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다.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 등과 한글 창제를 앞두고 명나라 언어학자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기여하였다. 1455년 4월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왕의 국문(鞫問: 중죄인을 신문하는 것)을 받고 사망하였다. 원래의 묘역에 상석, 문인석, 석주 등을 최근 제작하여 배치하였다.
『성삼문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양촌리의 산고개를 넘던 인부가 “날도 덥고 무겁고 피곤해 죽겠네” 하면서 불평을 하자 지게에 짊어져 있는 성삼문의 시신에서 “그렇게 무겁고 귀찮거든 아무데나 묻어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인부는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벗어 던지고 도망 가 주변에 살던 선비들이 성삼문의 시신을 근처 산에 매장하여 오늘날의 성삼문 묘소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고개를 오늘날도 논산지역 사람들은 성삼문고개라고 한다. 묘소 아래에는 성인각(成仁閣: 1990년대 후반 건축)이란 제각이 있고 매년 음력 10월20일 제향을 모신다.』 <by 디지털 논산문화대전>
성삼문 묘소, 석비 '매죽헌성선생지묘', 하마비 뒤의 비석은 애초의 비석이었던 듯
2부 끝내고 3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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