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우기

논산지역과 익산 미륵사지-1

아름답지만~ 2016. 7. 6. 11:14

더위가 성큼 더 다가오기 전 비교적 서로 근거리에 위치한 몇 곳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다녀왔다. 거리는 짧지 않았지만 언제나 여행에서 뜻을 같이하는 아내와 일찍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있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다녀온 것들은 보다 깊이를 더해 기록 하기로 하고 우선 요약을 해 보았다.

                         명재고택 앞의 자귀나무꽃과 400년 이상된 느티나무 밑에서 명재고택을~


                                        계백장군 유적지의 해당화와 쌍계사 대웅전의 꽃살문


                           견훤왕릉 주차장에서 왕릉공원 가는 길과 미륵사지 석탑해체 부재들

1) 다녀온 날과 거리 요약 (20160626)

[출발:0540/00km]-정안휴게소[0643/90km]-명재고택[0805~09/43km]-계백장군 묘역[0925~1030/15km]-김장생 묘역일원[1040~1055/4km]-쌍계사[1125~1148/15km]-성삼문 묘[1155~1207/4km]-견훤왕릉[1227~1249/12km]-익산 미륵사지[1317~1415/23km]-우리맛 황토쌈밥[1415~1450/1km]-천안 호선당[1626~1637/104km]-안녕농협[1747~1759/55km]-[1827/13km] [[총주행: 379km/ 12시간47]]

2) 소요경비: 식대 30,000[조식 14,000, 중식 16,000]

차량경비 80,000[하이패스 충전 50,000, 주유 30,000]

기타 26,000[쌍계사 보시 등 11,000, 호두과자 15,000]       총 소요금액 136,000

     쌍계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 삼불상과 점심을 맛있게 먹은 차림표,아침은 정안휴게소 형편없는 차림표~

3) 다녀온 곳의 고찰

1. 논산 노성면

명재고택(明齋故宅)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노성면 교촌리 306)

[ 중요민속문화재 제90, 조선시대의 건물 ]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선생의 고택으로 1709년에 지어진 고택이다. 고택을 향하여 왼쪽에 장방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에 원형의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房)”라는 전통적인 성리학적 우주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조경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by bjk3108님 블로그 인용>


                                 연못과 고택, 그리고 고택서 궐리사를 향하는 언덕에 배치된 노서서재

사랑채에는 현판에 이은시사(離隱時舍)’가 마주 보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떠나고 은거할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집의 뜻을 가지며 명재의 9대 손인 윤하종이 썼다고 한다. 사랑채의 누마루로 들어가는 입구의 현판은 도원인가(桃源人家)’라고 붙었는데 누마루 앞의 석가산과 연지(蓮池), 집주위 소나무의 수려한 경관이 무릉도원에 버금간다는 표현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붙은 현판은 허한고와(虛閑高臥)’하늘을 가리고 한가히 눕는다로 은거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음을 뜻한다.       <by 분당친구 블로그 인용>

                                         이은시사의 현판이 걸린 사랑채 누마루와 노성산 줄기에 느티나무 고목

                                                                                 아래는 노서서재

선생의 할아버지는 황()이고, 아버지는 선거(尹宣擧: 1610~1669)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으로 아버지와 유계(俞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 김집의 권유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현종 4)에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는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699년 부친상을 당하여는 주자의 가례에 의거했다.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받은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수차례 요구하나 응하지 않으므로서 사제지간이었던 송시열과의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었다. <by 다음백과 및 충청남도 자료인용>

                                                         윤증의 후손들이 살고있는 살림집과 뒤로 조상을 모시는 사당


                                                  장독대 주변에서 본 사당과 안채 그리고 얕은 언덕의 느티나무 고목

열녀(烈女)공주이씨(公州李氏)정려(旌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264

윤선거(尹宣擧)와 결혼한 공주이씨(公州李氏)는 이장백(李長白)의 딸로 윤증(尹拯)의 어머니이다. 윤선거는 1633(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1636년 청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규합,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그 해 12월 청 태종이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윤선거는 여기에서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순절(殉節)을 약속했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공주이씨는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평민으로 위장해 탈출하였다. 목숨을 부지한 윤선거는 평생 그를 괴롭히고 자책하였으며 재혼도 하지 않았고 나라의 부름에도 응하지 아니하고 은거하며 성리학과 예학에 잠심했다. <by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사전 등 인용>

정려비의 글[열녀(烈女) 고 징사(故 徵士)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贈 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겸령(兼領) 경연 홍문관(經筵 弘文館) 예문관 춘추관(藝文館 春秋館) 관상감 사(觀象監 事) 세자 사 시(世子 師 諡)문경공 윤선거지처(文敬公 尹宣擧之妻)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공주이씨지려(公州李氏之閭)]을 정리하면 열녀인 공주이씨와 학문과 덕행이 높으신 살아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윤선거에게 정일품의 품계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죽은 사람에게 내리는 벼슬)하며,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 세자의 스승을 지낸 문경공 윤선거의 처에게 정경부인의 명예, 정려를 내린다. <by 옛문화답사회 블로그 인용>



궐리사(闕里祠)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1 [충청남도 기념물 제20]

궐리사는 공자가 자란 마을인 궐리촌(闕里村)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공자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영당(影堂)을 말한다. 궐리사는 강릉,제천,화성(수원)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이곳 노성에만 남아 있다. 1687(숙종13)에 송시열(宋時烈)이 건립을 추진하였고, 권상하(權尙夏) 등 송시열의 제자들이 1716(숙종42)에 노성 이구산(尼丘山: 노성산의 다른 이름)에 세웠다. 그 후 중국에 가는 사신 편에 공자의 영정을 부탁하여 숙종 44년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1(정조15)에는 송조(宋朝) 오현(五賢: 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1805(순조5) 관찰사 박윤수(朴崙壽) 등이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현재의 규모는 당시의 규모보다 축소된 것으로, 일명 춘추사(春秋祠)라 한다. 건물 배치는 하마비(下馬碑)와 홍살문이 있고 외삼문, 강당인 현송당(絃誦堂), 내삼문, 사우(祠宇)인 궐리사 그리고 모성재(慕聖齋)와 관리사, 문간채 등이 있다. 궐리사의 남쪽에 석주(石柱)가 있는데 사용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기단 위에 배흘림의 각주석(角柱石)을 세우고 탑()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려놓은 모습과 궐리라는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아 아마 궐리사의 표시물로 이용된 듯 하다.


                                                                             외삼문과 담너머로 본 현송당

                                                                                     아래는 궐리탑

우리는 역사를 뒤적일 때 다시한번 자료를 뒤적이게 된다. 화성(수원)은 진작 오산으로 고쳐졌어야 할 문구이고, 기념물에 속하지도 못하나 진주의 궐리사를 진주에서는 거론한다.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에 있는 궐리사는 기념물의 지정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공씨의 재실로 부른다고 하며 언제 세워졌는지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가까이의 오산 궐리사를 찾지 않고, 찾아간 궐리사는 옆의 넓은 터에 공자의 석상이 있으나 가까이 가지를 않아서 자료를 뒤지다가 공자 석상 주위에 4대 성현(안자증자자사맹자) 석상이 배치됨을 알았다.<by poet314, pjk3108블로그 인용>


노성향교(魯城鄕校)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8 [충청남도 기념물 제118]

향교는 조선시대 관립 교육기관으로 각 고을마다 세워져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던 곳이다. 노성향교는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향교의 처음 위치는 현재 노성초등학교 부지였던 것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지금의 자리에 옮기어 지었다. 대성전은 정면 3,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영정을 비롯한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오현(五賢)과 송나라 2(정희주희),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520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향(祭香)하고 있다.

우리가 찾은 시간이 빨랐음에도 관광객인 듯한 사람도 많고 승용차도 몇 대 서 있어서 이렇게 일찍 왔을까? 어느 분께 물으니 고택에서 민박을 했단다. 이곳 저곳을 돌아 괴목나무(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는 장독대와 고택이 아름답다. 성급하게 돌아 본다고 나중에 본 명재고택 사색의 길 2코스를 전망대만 빼고 돌았다. 새벽의 산책은 기분 좋을 수 있으나 몸의 상태가 그리 가볍지 않아 첫 코스에서 무리를 했고, 전날 이곳에는 많은 비가 내렸는데 흘러든 토사를 깨끗이 치우는 분이 있어 대화를 나누다가 보니 비슷한 년배(실제는 1년 아래)라 군생활도 비슷하게 했는데 근처에 살면서 근무자가 아닌 서비스를 하고 있단다. 유적지가 더욱 빛날 일이다.

                                                               노송산 산자락의 싱싱한 소나무와 선비계단의 모습


                                 전망대 50m전 삼거리에서 궐리사로 향하는 계단길과 연못 앞에 명재고택 안내판


                                                                     노성향교의 입구 홍살문과 안의 명륜당

                                                      1부를 마치고 2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