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부석사(浮石寺)

아름답지만~ 2019. 3. 18. 18:02

불영사를 다녀나와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않아 봉화의 유적지를 들리지 못하고 내처

달리다가 봉화로 들어서니 차를 세우고 밥 먹을 곳이 부석사 앞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석사로 행선지를 정하고 달려 13시가 조금 지나서 부석사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주차장앞 부석사식당에서 산채정식을 먹고 부석사를 오랜만에 다녀왔다.

 

봉황산부석사로 알고 있는데, 새로운 일주문은 태백산부석사로 현판을~

 

 

 

 

부석사 배치도[1.자인당, 2.응진전, 3.조사당, 4.삼층석탑, 5.선묘각, 6.무량수전, 7.석등,

8.안양루, 9.부석, 10.삼성각, 11.삼보실, 12.화엄선원, 13.관음전, 14.종무소, 15.요사,

16.종각, 17.선열당, 18.범종루, 19.장경각, 20.응향각, 21.보장각, 22.쌍탑, 23.회전문,

 24.요사, 25.지장전, 26.원융국사비각, 27.박물관]

 

 

1. 다녀온 날: 2019년 3월 7일

2. 다녀온 곳 정리

부석사(浮石寺) 당간지주(幢竿支柱)

절의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

(幢竿支柱)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같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위 안내글이 당간지주 설명문으로 복기되었음.

 

 

② 부석사(浮石寺) 삼층석탑(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이 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 289호)’에서 나누어 온 사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이며, 2 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두 탑의 양식이 같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 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 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맨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 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짜 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복기된 부석사삼층석탑 안내문입니다.

③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本堂)으로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

(義湘大師, 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 현종7년(1016)에 국융국사(國融國師)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7년

(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2년(1376)에 국응국사(國應國師)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3년(1611)에는 폭 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 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석등(石燈)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팔각 석등이다. 맨 아래 네모난

바닥 돌의 옆면에는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에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8개 조각하고 그 위에 각기 8개의 귀꽃 봉오리 장식을 하였다. 그 위에 놓인 팔각기둥의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모양의

장식이 8개 새겨져 있다. 불을 밝히는 화창(火窓) 사이의 네 면에 새겨진 정교하고 세련된 보살상

(菩薩像)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석등 정상에 있던 장식은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④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상(像)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6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21년(1490)과 선조6년(1573)에 다시 고쳤다.

고려 신종4년인 1201년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바 있어 조사당이 세워진 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정면 3칸,측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 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무량 수전과 같이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안쪽 벽에는 고려 시대에 그려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그리고 사천왕상

(四天王像)이 있었는데, 1916년에 건물을 수리하면서 떼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원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벽화이다. 현재의 조사당 내부에 있는 벽화는 새로 그린 것이다.

 

 

 

조사당(祖師堂) 선비화(禪扉花)

선비화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중생(衆生)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

(詩)를 짓기도 하였다.

「탁옥삼삼의사문(擢玉森森椅寺門) 빼어난 옥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에 비꼈는데

승언탁석화령근(僧言卓錫化靈根)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내렸다 스님이 일러주네

장두자유조계수(杖頭自有曹溪水) 석장의 끝에 혜능 선사 조계의 물에 닿았는가

불차건곤우로은(不借乾坤雨露恩) 천지의 비와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⑤ 부석사(浮石寺)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탑신 1층의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⑥ 부석사(浮石寺)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塑造佛像)인데,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불상의 높이는 278cm이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일반 사찰과는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마련된

불단(佛壇) 위에 모셔져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법당이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 이라는 사실과, 부석사 ‘원융국사비’ 비문에 ‘좌우에 다른 보처(補處)

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 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온몸에 금빛이 화려하며,

고려 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이다.

〇 밥을 먹고 오르는 길은 무척 힘에 겨웠다. 천천히 둘러보고 무량수전에 들러 삼배를

올리고 보니, 사진촬영 금지라고 계시를 해 놓아 사진을 담지 못하고 나왔다. 응진전과

자한당 그리고 성보박물관의 방문은 생략하고 나왔다.

 

 

 

 

부석(浮石)

신라 문무왕1년(661)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 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방해를 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부석사식당과 부석사 가는 길에 있던 소백산 자락길의 안내가 있어 별기로 다루고자

아래에 그 내용을 세세히 기록합니다.

※소백산 자락길 구간별 거리 및 소요시간

[선비촌]-선비길-[삼괴정]-구곡길-[초암사]-달밭길-[삼가주차장]

<1자락 (13km, 4시간30분)>

[삼가주차장]-학교길-[금선정]-승지길-[풍기소방서]-방천길-[소백산역]

<2자락(약16km,4시간20분)>

[소백산역]-죽령옛길-[죽령]-용부원길-[용부원리]-장림말길-[당동]

<3자락(약11km,3시간20분)>

[[당동]-가리점마을옛길-[금곡리]<4자락(약12km,3시간)>

[금곡리]-황금구만량길-[보발분교]<5자락(약16km,3시간55분)>

[보발분교]-온달평강로맨스길-[영춘면사무소]<6자락(약14km, 3시간25분)>

[영춘면사무소]-십승지의풍옛길-[의풍리]<7자락(약18km,4시간30분)>

[의풍리]-접경길-[삼도접경공원]-대궐길-[주막거리]<8자락(약7km,1시간50분)>

[주막거리]-방물길-[늦은목이재]-보부상길-[오전댐]<9자락(약7km,2시간05분)>

[오전댐]-쌈지길-[봉화학예관]-소풍길-[부석사]<10자락(약7km,1시간50분)>

[부석사]-과수원길-[소백산예술촌]-올망길-[남절]-수변실-[좌석교회]

<11자락(약14km,3시간45분)>

[좌석교회]-자재기길-[자작재]-서낭당길-[점마]-배점길-[삼괴정]<12자락(약8km,2시간25분)>

 

 

 

 

※주요관광안내도(영주시)

1. 콩세계과학관[세계 최초로 콩을 테마로 한 과학관으로 부석태,콩과 관련된 역사,문화,기능 등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

2. 소수서원[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한국 선비문화의 창출지이며, 민족교육의 산실로 퇴계선생의

제자를 포함하여 4천여 명의 유생 배출]

3. 선비촌[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조성한 교육장]

4.심판서고택[세 분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사헌부 지평 황전 등 수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한 고택 제현 건물]

5. 무섬마을[“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외나무다리와 전통가옥이 보존 되어있는 무섬마을

(2015 한국관광의 별)]

6. 인삼박물관[우리나라 인삼의 역사와 관련정보, 인삼을 통해 건강을 염원했던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국내 유일의 인삼 전문박물관]

7. 풍기인삼시장[영주시 특산품인 풍기인삼을 판매하는 인삼전문시장으로 현재 45개개의 점포가

운영중임]

8. 국립산림치유원-다스림[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하여 국민건강을 증진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조성된 산림복지단지]

9. 소백산자락길(죽령옛길)[영남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으로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2.5km의 길 복원]

10. 영주댐-물문화관[우리나라 물 관리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관련 자료와 영주댐

건설전 고향의 모습과 문화재 전시]

11. 영주댐-오토캠핑장[영주다목적댐 하류에 조성된 오토캠핑장으로 다양한 형태의 숙박시설과

야외무대,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을 갖춘 명품캠핑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