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3. 탈해왕릉~백률사

아름답지만~ 2019. 3. 31. 20:57

경주를 대여섯 번 다녀갔어도 탈해왕릉과 표암은 처음으로 찾은 곳이다. 미리부터

탈해왕릉은 평범한 곳을 알고 찾았으나 왕릉 앞의 소나무 숲이 정갈하게 맞아주는 듯

했고, 경주 이씨의 근원지라는 표암은 그 앞의 표암재로 모습 전체를 깔끔하게 볼 수

없음이 불만족스러웠다. 먼저 번 찾았을 때 자료를 조사했더라면 굴불사지와 함께

방문할 수도 있는 짧은 거리여서 걸어서 굴불사지를 찾고 백률사까지 다녀와 다음

행선지를 첨성대서 하고자 택시콜로 첨성대가 보이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1. 찾았던 날: 2019년 03월 20일

2. 가는 길: 대중교통으로 조사가 되지 않는 곳에 위치하기에 분황사에서 기본요금인

탈해왕릉 앞에서 내리니 먼저온 부인들 택시는 주차장에 내려줘 우리가 앞서온 일행을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3. 둘러보기: 먼저 눈에 띈 악강묘와 입구를 지키는 문이 반기고, 표암재 앞에는 인근에

사시는 듯한 노인분들 대여섯이 한가로히 잡담을 나누고 계신다. 담 넘어로 표암재를 담고

탈해왕릉 쪽으로 옮기며 표암을 담고 왕릉으로 옮겨갔다. 멀리서 일행들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윤기가 나는 듯 했다.

 

 

경주(慶州) 표암(瓢巖)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507-7

표암이라는 이 바위 이름은 ‘박바위’ 혹은 ‘밝은 바위’를 뜻하며, 신라 6촌 가운데 급량부(及梁部)였던

알천(閼川) 양산촌(陽山村)의 시조 이알평(李謁平)공(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진한(辰韓) 땅에 여섯 촌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알천 양산촌이며 그곳의 촌장은 알평이었는데, 그는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峰)으로

내려와 급량부 이씨(李氏), 즉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은

급량부라고 하였으며, 고려 태조(高麗 太祖)23년(940)에는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치고

급잠(汲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을 이곳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또한 이 곳은 신라 화백회의의 연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표암은 경주 이씨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로서도 중요한 역사적 유래를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복기임)

 

 

경주(慶州) 탈해왕릉(脫解王陵) 사적 제174호

이 능은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倭國)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비가 잉태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

(阿珍浦)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키웠다. 이 때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궤를

풀고 나왔다해서 이름을 탈해라 지었다.

석탈해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으며 치세는 23년이었다. 세상을 떠났을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동악(東岳)에 모셨는데 지금의 동악대신이다”라고 하였다.

이 무덤은 높이 약 4.5m, 지름 약 15.5m이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렸다. 입구에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 복기)

소금강산을 산책하듯 걸어도 좋으련만 경주이씨 표암화수회 건물을 지나쳐 굴암사지로

 

이동해 굴암사지를 둘러보고 몇이서만 조금 등산하듯 벡률사까지 가 대웅전에서 우리들

이번 여행의 무탈을 빌고 내려와 일행과 입구 주차장에서 택시콜을 연결해 두 대의

택시를 부르고 잠시 기다렸다.

 

 

 

 

 

 

 

 

 

 

 

 

5. 소회: 먼저 아내와 왔을 때 이름도 근사한 소금강산 정상을 올라 보았다. 기대했던

무엇도 없는 곳이라 실망했기에 또 일행들이 걷는데도 별로인 분들이 많아서 치장이

없는 왕릉과 표암의 바위벽을 둘러보고 굴불사지의 불상만을 바라보므로 여정을 마쳤다.

역사의 깊이를 더한다면 백률사도 모두가 올랐으면 했지만 기대할 처지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