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오산 독산성 주변 돌기

아름답지만~ 2020. 1. 28. 17:38

산림욕장 주차장은 정비가 되어있어 자가용을 가지고 갈 때는 여건이 좋다. 하지만 약10여 분 급경사지에서 체력 소모가 급하게 많은게 다소 흠이다. 얼마전 삼국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고해 그 기록을 얻고자 디카를 가지고 가 전에 많이 담았던 모습도 재차 담으니 중복도 적지 않으나 공부하는 자세로 정리해 본다.


독산성 발굴성과 현황

삼국시대 성벽(6세기 후반)-진흥왕[(추정),보강료,기단보축,주혈(가구목),채성벽,기제부조성 층]

통일신라시대 성벽(수축) (7세기 중반 이후) [삼국시대 성벽(7세기 중반) 문무왕]

* 1592(선조 25)-의병장 김천일 독성산성 주둔하여 왜병 격퇴

-전라도관찰사 겸 수반사 권율 독성산성 주둔하여 우키다 헤데이에군과 전투승리

(조선시대 성벽 1차 수축-임진왜란 전)

* 1594(선조 27)-경기관찰사 유근의 독성산성 수축(水口,조선시대 성벽 2-임진왜란 후)

* 1602(선조 35)-석성으로 수축기존성벽이 토성이었을 가능성이 많음

* 1603(선조 36)-변용성장군이 성을 수축,샘을 만듬,궁노,포화,기계 등 무기를 설치

(200호 민가와 관정 100)

* 1624(인조 2)-경기도 군대를 재편하여 총융청 설치

* 1750(영조 26)-영조가 온양온천 행차하였다가 독성산성 행차, 남문과 서문에 누각 설치

* 1760(영조 36)-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한 후 독성산성에서 하룻밤 유숙,진남루에 올라 활쏘기 함.

* 1790(정조 14)-운주당에서 부로들을 위로하고,사도세자가 유슈하였을 때를 물으시고,

민호에게 연포를 지급

* 1792(정조 16)-수원부 중군 이한흥과 민광득이 5,031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고쳐 쌓음

* 1805(순조 5)-서문 출입을 통제하고 암문 설치

* 1831(순조 31)-화성유수 박기수에 의해 3개월에 걸쳐 수축,관청건물(문주동,진남루 등) 일제 정비

                                                 (위 사진의 글을 복기한 것입니다)

                출발 5분여 산림욕장주차장이 보이고, 서문지로 오르는 급경사 계단길이 살짝 보인다.


오산 독산성(烏山 禿山城)과 세마대지(洗馬臺址)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장수의 지휘대)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옹진 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고쳐

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1602)에 방어사 변웅성이 석성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16(1792)

에는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정조 20(1796) 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체제(協守體制; 서로 협력하여 지키는 구조)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 안에 보적사가 있다. 내부 시설물로 성문 5, (;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 8, 우물 1,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위 사진의 글을 복기한 것입니다.)


서문(西門)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 14(1790)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 문은 순조 4(1804)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3년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있게 하는 것) 2개가 남아 있다.

                               (위 사진의 글 복기한 것입니다.)

                   위는 황구지천에 걸린 고속도 분기하는 모습(171,400 고속도)




멀리 보이는 성 밖의 암문과 내부에서 본 암문


위 사진 뒷쪽의 가운데는 세마초등학교와 e편한세상 아파트인 듯




위 사진 성벽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끝나는 중간 성벽이 잘린 듯 보이는 곳이 남문지이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유적

독산성의 연혁

사적 제140호로 지정(1964. 8.29)

삼국(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짐(통일신라~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됨)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의 항전과 권율장군의 세마병법으로 왜군에 항전한 일화가 유명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기록[순조 31(1831)]과 봉수대를 설치한 기록이 남아 있음.

숙종 16(1690)에는 수원 화성과 함께 수원유수부의 남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가 모두 다녀간 성으로 이곳에 머물러 백성들의 고충을 위로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정조의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

독산성의 조사연혁 및 향후계획

1999년 지표조사를 실시(한신대학교 박물관)

2000년 시굴조사를 실시(경기문화재연구원)

2016년 정밀학술지표조사(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 박물관)

2017년 시굴조사(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 박물관)

2017년 정밀발굴조사(1) (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 박물관)

2018년 정밀발굴조사(2) (중부고고학연구소, 한신대학교 박물관)

2019-시굴조사: 세마대지 일원, : 남문지 주변 원성벽에 대한 조사

-발굴조사: 북동치(치성1)하부 원성벽에 대한 조사, : 남문 내측 평탄지(3),

: 북문지 하부 원성벽에 대한 조사

독산성의 2018년 조사결과

면적: 2,500(남문 내측 일대)

유구: 조선시대 생활유적 (축대,건물지,주거지,수혈유구,통행시설,배수시설 등)

유물: 통일신라시대 토기와편기와편

고려-조선시대 토기도기청자백자기와편 등

조사성과: -조선시대 후기까지 생활한 흔적 확인

-협소한 성내 공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축대로 여러 단을 마련한 후 건물을 지음

-독산성 운영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건물지로 확인

-조선시대층 하부에서 통일신라시대층이 확인되어 선대 문화층의 존재가 확인됨

                    (위 사진의 글을 복기한 것입니다.)

위,아래는 남문지 주변 발굴현장을 앞에서 위에서 담은 사진입니다.(1,2차 발굴조사지역)





위 사진의 지붕만 보이는 곳은 보적사 대웅전이다.



                 위 사진은 3차 발굴조사지역이다. 아래는 보적사 대웅전으로 입춘기도로 신도가 북적거린다.





양산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우측으로 돌아서 후면에서 올랐다.




원점 회귀의 서문이 보이는 곳 대략 1시간 50분 운동했다.


아래의 이정표를 따르면 한 여름에도 무리없을 듯하다. 점심을 콩마당에서 먹으러 갔는데

고교 동창을 만났다.  우리가 사는 곳이 이렇게 좁다는 반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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