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김생사지(金生寺址)

아름답지만~ 2015. 10. 29. 13:29

김생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로 711(성덕왕10)에 태어났으며, 791(원성왕7)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미(寒微: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함)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서도(書圖)에 정진해 예서행서초서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송()의 변경에 체류할 때 김생의 행서와 초서를 가져다 보이자 송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 그뒤부터 중국 사신들은 김생의 필적을 매우 귀하게 여겨 얻어갔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안동 문필산 김생굴(金生窟)김생사(金生寺) 등 그와 관련된 풍수유적이 전하며,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고 불렸다.

안동 문필산, 경주 경일봉, 봉화 청량산 등의 석굴 같은 곳에서 글씨를 힘써 공부하고, 충주 북진애(北津崖)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어 두타행(頭陀行:번뇌를 끊고 의식주에 대한 탐심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일)을 닦았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 <대동서(大同書)>에도 몇 점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밖에도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백월서운탑비(白月恓雲塔碑)>가 있다. (by 다음백과사전)

1. 다녀온 날; 201576일 월요일 일과 끝내고

2. 가는 길; 교통대-3번국도()-용두교차로(원주방향)-19번국도-유송교차로()-김생로()- 김생사지(19국도 교각 밑 지점) [8.6km, 12]   안내판이 우측에 있으나 지나치기 쉬우며 교각밑 갈림길도 있어 교각밑 다소 넓은 터 주차

김생사지(金生寺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4,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신라시대 명필인 김생이 말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탄금대 건너편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과수원 및 밭으로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으며, 곳곳에 기와 및 장대석 토기 등이 산재해 있고 밭 한쪽에는 김생 유허집자비가 건립되어 있다. (1986)

기와는 통일신라에서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것들이 산재되어 있고 최근까지 조선시대의 고가(古家)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헐리고 대신 양옥이 건립되어 있다.

출토된 자기는 청자에서 조선시대 분청사기,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초창된 이래 지속적으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고가 본채 용마루의 망화에는 강희(康熙)삼십년(三十年; 숙종18; 1691) 부속건물의 평기와에서는 건륭을미(乾隆乙未: 영조51; 1775) 등의 명문이 나왔는데 이 시기에 절터에 대한 변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현황; 김생사지를 너무 늦게 개발했는지,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서인지 넓은 잔디밭에 집자비(集字碑)를 세운 것으로 소명을 다한 듯 아쉬운 절터였다. 주변은 농토였고 달리 내세울 자료들을 찾지 못해서일까?

보다 많은 자료를 찾아 헤매니 다소 새로운 사실과 김생을 회고하는 대회도 있어 부기한다. 강진신문에서 나왔던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의 편액 글씨가 신라의 명필 김생의 필적과 연관이 있다는 글이다. 성리학의 거목인 송시열(1607~1689)은 이 편액을 본 적이 있는데, 1689년 제주로 유배 가는도중 강진에 도착했지만 바람이 거세어져 잦아 들기를 기다리고자 백련사에 기거하면서 김생의 만덕산 백련사’, 안여해가 쓴 만경루’, 서역문자로 된 현판을 보았으나, 김생 필적에 대해서는 승려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설왕설래하며 의문과 인정을 반복하며 차츰 김생의 글씨화 되었다는 글이 올라 중략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를 차입해 4장 올렸음

 

옛돌이라는 필명의 블로그는 청량산 김생굴에서 김생 친필의 음각이 발견되었다고 했으며, 김생선생 1300필신문도(筆神聞道)라는 책은 예술의 전당에서 발간했는데, 신라의 대표적인 서예가 해동서성 김생 탄신 1300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과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연 특별전 필신과 문도전에서 공개된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필신전시는 김생에서 추사까지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역사에서 찾고, ‘문도전시는 우리시대 서예와 미술에서 대표작가인 권창륜과 박대성을 통해 우리 서예와 그림의 미래를 김생을 통해 모색하였다고 한다.

충주에서는 매년 우륵문화제(2015년은 45회로 910<목요일>~913<일요일> 열렸음)에서 여러 행사(1일차 명현 5위 추모제, 민속놀이 경연대회 등, 2일차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전국사물놀이 경연대회, 어린이재롱잔치, 어린이흙빗기,학생미술실기대회, 서예대전 등, 3일차 전국학생무용경연대회, 25회 김생전국휘호대회 및 20회 김생전국학생휘호대회, 국악한마당 녹화방송, 강수백일장, 중원전국백일장 등, 4일차 시민자전거타기, 충주마수리농요시연, 우리소리경연대회 등)를 개최하고 있다. 이 모든 축제는 충주예총이 주최하며 충주시가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건립연기문(建立緣起文): 우리 서예사(書藝史)는 그 시원(始源)을 한문(漢文)의 전래(傳來)에서 찾아야하니 삼국(三國)의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전한(前漢)의 고예(古隸)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후한(後漢)의 팔분장죽(八分章竹) 및 위진(魏晉)의 해행죽등제체(楷行竹等諸體)가 시류(時流)에 쫓아 차례로 들어와 우리 것으로 정착(定着)되어 나갔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명필가(名筆家)도 많이나고 명작(名作)도 많이 남겼으련만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같은 걸작(傑作)조차 저자(著者)의 이름이 남겨져 있지 않아 삼국(三國) 이전(以前)의 서예사(書藝史)는 적실(寂實)하기 그지없다. 신라통일(新羅統一) 이후(以後) 역시(亦是) 초당년대가(初唐年大家)의 출현(出現)과 같은 시대적(時代的) 서예사조(書藝思潮)에 힘입어 많은 명필가(名筆家)의 출현(出現)이 있음직한데 이들에 대한 기록(記錄)은 찾을길 없고 삼국사기열전(三國史記列傳)에 오직 김생전(金生傳) 하나만을 두고 요극일(姚克一)을 부기(附記)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김생(金生)이 우리 상대(上代) 서예사(書藝史)를 대표(代表) 할만한 특출(特出)한 서예가(書藝家)인 것을 알 수 있는바 그 내용(內容)을 요약(要約)하면 부모(父母)가 한미(寒微)하여 세계(世系)를 알지 못하나 경운(景雲) 이년(二年)에 출생(出生)하여 팔십여 세(八十餘 歲)를 살았고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죽을때까지 붓을 놓지않아 해행죽서(楷行竹書)가 모두 신품(神品)에 들었다. 그래서 후일(後日) 북송휘송숭녕간(北宋徽宋崇寧年間)에 고려학사(高麗學士) 홍관(洪灌)이 그 진적(眞蹟)인 행죽일권(行竹一卷)을 가지고 송()에 가서 보이니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진적(王羲之眞蹟)으로 오인(誤認)하고 오히려 김생(金生) 글씨라는 홍관(洪灌)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以後)에 이인노(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서도 김생(金生)의 글씨가 신묘(神妙)하여 오십칠종(五十七種)의 제가체세(諸家體勢)를 멀리 뛰어넘었다 하였고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신라 고려(新羅 高麗) 통틀어 명필가(名筆家) 넷을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꼽는데 김생(金生)을 제일(第一)로 쳤으며 원()의 조맹돈(趙孟頓)도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서 신라승(新羅僧)김생(金生)이 쓴 이 비문(碑文)이 당인(唐人)의 명각(名刻)보다도 뛰어나다고 극찬(極讚)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면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성현(成俔)의 용제총화(慵齊叢話)에서 모두 김생서(金生書)를 제일(第一)로 치고 원교(員嶠)이광사(李匡師)는 필결(筆訣)에서 동국필법(東國筆法)은 신라김생(新羅金生)으로 송()을 삼는다고 하였으며 드디어 홍량호(洪良浩)는 김생(金生)이 동방서가(東方書家)의 시조(始祖)라고까지 일컫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主張)은 한결같이 김생(金生)이 중국(中國)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필체(筆體)의 신수(神髓)를 얻어 오히려 그를 능가(凌駕)하였다는 것이다. 사실(事實) 김생(金生)의 진적(眞蹟)으로 알려진 백율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와 고려초(高麗初)에 승단목(僧端目)이 김생(金生)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긴 무랑인대사(無朗垔大師) () 백월서운탑비(栢月恓雲塔碑)의 글씨를 보면 극도(極度)의 귀족적(貴族的) 세련미(洗鍊美)가 응축(凝縮)되어 유려전아(流麗典雅)하기만 한 왕희지체(王羲之體) 보다 한결더 골기(骨氣)가 승()하여 청경탈속(淸勁脫俗)한 일취(逸趣)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고유미감(固有美感)인 소삽기(疏澁氣)의 가미(加味)로부터 이루어진 고유색(固有色)이라할 것인바 과연(果然) 김생(金生)은 동방서가(東方書家)의 시조(始祖)로 꼽아 손색(遜色)없는 명필가(名筆家)라 하겠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김생사조(金生寺條)에 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으며 이 절에서 살았으므로 그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 김생사(金生寺)가 김생(金生)이 주석(駐錫)하던 절이었음은 틀림없겠는데 안동문필산(安東文筆山)은 김생(金生)이 글씨를 배운 곳이라는 거주(胠註)가 붙어있어 김생(金生)이 안동(安東)에 가서 글씨를 배우고 이로 득명(得名)한 후()에 고향(故鄕)인 이곳 충주(忠州)로 와서 여생(餘生)을 보내려고 지은 절이 김생사(金生寺)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는 선현추모사업(先賢追慕事業)의 일환(一環)으로 이곳 김생사지(金生寺址)에 김생(金生)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보존(保存)하려는 뜻을 세우고 충청북도(忠淸北道)로 하여금 그를 집행(執行)케 하니 이로말미암아 이 기념집자비(記念集子碑)가 이곳에 서게 되었다. 인연인생(因緣人生)의 도리(道理)가 천백세후(千百歲後)에 때를 만나 성취(成就)되니 가위(可謂)성거(盛擧)라 하겠다.

                                                                                                                    西紀一九八六年 四月 崔 完 秀 選, 金 東 淵 書

4. 에필로그; 그처럼 그 시대를 풍미하던 서성(書聖)의 흔적들이 대부분 유실되거나 보존되지 못함은 실로 안타깝고 아쉬운 현실이다. 넘쳐나는 문화 속에서 보이지 않는 홀대를 우리는 조심해야만 할 일이다. 삼국시대의 작품들 중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는 광개토대왕비도 지금은 중국 땅에 존재하지만 그 비석의 서체도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고 있다.

역사의 교훈을 잊고 산 세대가 우리에게도 있음은 안타깝고 아쉬움으로 남느건 어찌보면 문화적, 경제적 부유함에 도취된 나락으로 빠져드는 장래가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며 보다나은 미래를 열어 가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내 여행기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원들과의 동해안여행-2  (0) 2016.03.04
직원들과의 동해안여행-1  (0) 2016.03.04
오전약수 등  (0) 2015.10.27
부여여행 3. (백제문화단지)  (0) 2015.10.16
부여여행 2. (궁남지, 정림사)  (0) 2015.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