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광명시를 찾아서 (광명동굴, 오리이원익 유적지)-2

아름답지만~ 2016. 11. 1. 07:46

4) 충현박물관과 묘소 등: 서민적인 인품과 청백리 정신에 투철했던 오리 이원익

선생(1547~1634)유언에서조차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마라라고

하였다. 선조광해 군인조 3대에 걸쳐 5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벼슬에서 은퇴한 후

이곳 초가에 살 때 승지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본 즉 비바람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두 칸 초가집에 살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므로, 경기감사를 시켜 정당을 짓게하고

하사하였다. 그 집 조차도 그렇다면 5칸짜리로 지어주십시오라는 조건이 붙었었다고

하며 이 집이 관감당(觀感堂)이다.

내가 집을 하사하는 이유는 신민들이 그대의 청백리의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하는 것이다라고 인조가 말했다 한다. 임금이 하사한 건물로 유일하다.

관감당 (觀感堂) 1631(인조 9) 48.5cm104.0cm

인조 임금이 이원익 선생에게 하사한 집인 관감당의 편액으로, 관감당은 조선시대 임금이 하사한

사택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관감이란 보고 느끼다라는 뜻으로,

인조가내 가 집을 하사하는 이유는 신민들이 그대의 청백리의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이렇듯 관감당은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경기도문화재자 료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성공신도상 이원익영정(蔰星功臣圖像 李元翼影幀) 보물 제14351604(선조37)167.0cm89.0cm

1604(선조 37) 이원익이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난했던 공적이 인정되어 호성공신으로 녹훈 되었을

때 그려진 영정이다. 이원익은 선무공시까지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스스로 호종공신만을 인 정하였다.

본 작품은 섬세한 인물묘사와 공신상에서 주로 나타나는 15세기 1품 문관의 화려한 흉배 등에 서 17세기 초반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200575일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 1435호로 지정되었다.

평양생사당구장 이원익영정(平壤生祠堂舊藏 李元翼影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 1595(선조 28), 166.0cm93.0cm

평양지방의 서리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에 모셔졌던 영정이다.

이원익이 1595(선조 28) 우의정에 임명되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좌측 상단에 있던

화기(畵記)오리 집(梧里集)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작품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다.

다부지고 굳은 절개를 느낄 수 있는 얼굴 모습과 오른손에는 부채를 쥐고, 왼손은 관대를 잡고 있는 모습과

손톱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이는 불교 고승들의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서 화승(승려화가)이 그린 영정으로 추정된다.

19781010일에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이존도 영정(李存道 影幀) 1740(영조 166), 148.0cm82.0cm

이존도(李存道; 1659~1745)는 이원익의 4대손으로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망화(忙萵)이다. 이존도는 진사 (進士)

입격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이 후 완성군(完成君)으로 군()을 세습하며 가문을 이어갔 다.

사망한 뒤에는 아들 완양군(完陽君) 이인복(李仁復)의 원종훈(源從勳)으로 이상(貳相; 좌의정)에 추증되 었다.

이원익의 묘갈음기를 지었으며, 저술로는 전사통감(全史通鑑)60권과 망와만록(忘窩漫錄)4권이 있으나,

전자는 일부만이 남아있고 후자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문을 통과하면 충현박물관(오른편) 오르는 층계와 진열된 다디미돌, 또다른 물품보관소

관감당(觀感堂)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0<건물배치도와 함께>

조선 선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던 오리 이원익에게 인조(인조 8; 1630)가 하사한 집이다.

이원익이 벼슬에서 은퇴하고 이곳 초가에 살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어 그의 생활을 알아본 즉 비바람이 새는 퇴락한

집에서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므로, 경기감사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짓게 하고 하사하였다 한다.

관감(觀感)”이란 옥호는 그가 국가에 끼친 큰 공훈과 청백리로 임관한 자세는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하여

모든 신민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라는 뜻이라 전한다. 관감당은 병자호란 때 에 크게 훼손되었으나 후손들이

중건하고 관감당(觀感堂)이란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회벽을 했으며,

내부는 쪽마루이고 기단부는 장대석과 시멘트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이원익이 생존시에 각자(刻字)했다는

탄금암이라 새긴 바위가 있다. 1916년에 옛 집터에 중건하고 이듬해에는 종택 안채가 건립되었으며 1940년경에는

문간채가 건립되었다 고 한다. 동쪽의 종택과 같이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리(梧里)라는 호는 이 동네가 오동나무 고을로 불렸던데서 유래되었으며, 1637

병자 호란때 소실되었다가 1694(숙종20)에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큰길에서 좌회전하며 바로 우회전해야 하건만 지나쳐 되돌려 광명동굴

3주차장에 주차 시키고 찾으니 바로 앞 골목이다. ‘국내 유일의 조선시대 종가박물관으로

13대 종손인 이 승규씨와 종부 함금자씨 부부가 설립했다고 하며, 입장료를 받고 있어 표를

구입하고 들어서니 바로 앞은 층계, 층계의 양 가에는 다딤이돌이 빼곡이 진열되어 있다.

충현박물관에 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지,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물품 등과 이원익 선생의

영정과 친 필, 문집과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와 목가구 제기 등이 있으며, 야외전시장에는

관감당, 이 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오리영우(梧里靈宇), 부모인 함천군 내외의 묘소와

숙부 인 이억령의 묘소, 선생의 형인 이원보 내외의 묘소인 가족의 묘 및 풍욕대, 삼상대, 문비대

등이 있고 관감당 앞마당에는 400년 된 측백나무와 탄금암이 있다.

금양묘산기 (衿陽墓山記) 1741(영조 17) 2, 35cm24.0cm

금양(衿川) 지역에 있는 종가 묘소의 각각의 위치와 묘전(墓田)의 규모를 정리한 기록이다.

이원익에 의 해 1차 정리된 뒤 그의 유훈(遺訓)에 따라 1681(숙종 7)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李存道)와 이충도(李 衝道)에 의해 중간된 것이다.

이원익 종가의 묘전 정비에 관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계해사궤장연첩 (癸亥賜几杖宴貼) 1623 (인조 1) 11, 48.0cm35.5cm

1623(인조 1) 96일 이원익 선생이 77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예법에 따라

궁중에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고 연회를 베풀게 되는데, 당시 연회에 참석한 빈객(賓客)들이

주고받은 기념 축하사와 연회장면을 그려 담은 시화첩이다. 이 연회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기로연으로, 임진왜란 전후 문물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도 담겨 있다.

사궤장연첩: 궤장이란 나이가 70세 이상이 된 관료에게 내리는 의자()와 지팡이()

이르는 것으로국가의 크고 작은 일 때문에 퇴직시킬 수 없는 자에게 왕이 궤장을 내렸다.

의자와 지팡이는 몸을 기대고 있어도 좋으니 군주 곁에 더 머물러 국정운영을 도와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리 종가에도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궤장이 전해졌다고 하나, 현재는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종가의 문패는 이승규(李升圭), 이종민(李鍾旻),이장호(李長浩)가 붙어있다.

()는 함에 비해 크기가 크며, 문판(門板)이 앞면에 부착되거나 뚜껑을 위에서 열게 되어있다.

이들은 의류나 서책, 돈 등 귀중한 물건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함이나 궤는

각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적절히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형태가 일정하지 않으며 종류도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탄금암(彈琴岩)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바위이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문집인 오리집』 『년보(年譜)에 따르면,

선생은 현재 서울 동숭동 인 근에 사실 때 자주 낙산(駱山)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기셨다고 한다.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李仁 復)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文忠公遺琴來歷顚末記)>라는 글이 있어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하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탄금암은 이원익 선생이 청백리로 근검한 생활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옆 측백나무는 수령 약 440년으로 높이는 10m이다.


                       이억령은 이원익 선생의 숙부이다. 이 묘의 윗쪽으로 이억재인 이원익 선생의 부친 묘소가 있다.


                                   이원익 선생의 형인 이원보의 묘소, 옆에는 숙부의 묘소, 위쪽으로는 부친의 묘소


                               선생의 부친인 이억재의 묘소가 제일 높은 곳에 있고, 그 옆 조금 떨어져 풍욕대가 있다.


                                                         정자 옆의 풍욕대 석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상대

이상대(貳相臺) [충현서원지 일대에 있었던 표석으로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547~1634) 선생과 관련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삼상(三相)일반적으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모두 일 컬을 때 쓰는

용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이원익 선생이 삼정승을 두루 거쳤으며 많은 치적이 있었으 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 및 문인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비대(文備臺) [문비(文備)는 무비(武備)에 대비되는 용어로 학문과 교육에 대한 준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문비대는 서원의 교육적 기능과 부합하는 이름으로 서적 등을 보관하던 건물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표석은 충현서원지에 서식하는 잣나무 부근에 있던 것이며 돌의 재질

또한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재이다.

                                            2부의 정리를 마치고 다음으로 연결해 나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