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 등 336

고택(古宅)과 유적지 둘러보기-2

2. 고산정(孤山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이 건물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동에서 활약한 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 1530~1604)의 정자이다. 그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35세되던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에 정자를 지어 일동정사(日東精舍) 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하며 지냈다고 한다. 건립 당시의 사정과 주위의 경치는 「일동록(日東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퇴계 (退溪) 이황(李滉)도 여러 번 문인들과 함께 와서 머물다 갔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3m 가량의 자연석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다음 기단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정자..

고택(古宅)과 유적지 둘러보기-1

1. 해저1리 고택 몇 군데 바래미(해저; 海底)는 신라시대 파라미(波羅尾)라 칭하였다고하며, 마을이 하상(河上)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래미 혹은 바다 밑이라고해서 해저(海底)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말기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선생이 전거해 와 마을의 우물과 농토를 개척하고 정착한데서 마을이 번창하고 의성김씨(宜城金氏)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는 후학 양성을 위해 실학사상(實學思想)을 가르치던 학록서당(學麓書堂)과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 선생이 살던 남호구택(南湖舊宅)과 영규헌 (映奎軒), 김씨종택이 자리잡고 있고, 동쪽(윗마을)으로는 3.1운동 직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 청원..

진천(鎭川)의 유적지(遺蹟地) 등 (2020.10.16.)-3

5) 만뢰산 자연생태공원: 각곳의 문화해설위원 등이 추천하는 곳이라 당초 계획에 시간 때문에 포기한 곳을 되찾게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 공부할 수 있는 곳인 듯 했고, 우리도 야생초 화단지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식물 이름 공부를 좀 했다. 코로나19로인지 여유있는 주차 장과 야생화의 명패가 있어 꽃이 무성할 때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이웃한 보탑사로 달렸다. 4. 결언 두 부부가 다녀왔기에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만 움직였으면 좀더 많은 곳은 아니더라도 구석구석 다녀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기회가 된다면 많은 걸음을 투자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다리의 미르숲은 1시간 내지 2시간, 태실은 1시간 정도를 또 정송강사는 30분 정도를 투자한다면 깔끔..

진천(鎭川)의 유적지(遺蹟地) 등 (2020.10.16.)-2

2) 길상사: 2000년 이전 찾았던 기억을 더듬어 찾으니 따로 주차장도 완비하고 입구길이 은행나무 숲으로 잘 가꾸어져 있고 5분여 걷는동안 상큼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마시며, 전의 주차구역 까지 도착해 수많은 계단(110개도 넘는 듯)에서 일행은 포기하고 홀로 현판에 쓰인 길상사, 진호문, 흥무전까지의 계단을 올라 김유신 영정 앞에 묵념의 예를 갖추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3) 정송강사: 점심시간을 넘겨 여유롭지 못하게 서두르게 되었고 입구 좌측의 건물, 좌측으로 400m를 가면 있는 묘소도 생략하고 정송강사를 향해 현판의 글씨 문청문, 충의문과 송강사를 들려 정철 영정에 묵념의 예를 갖추고 내려섰다. 길상사 계단의 반(50여 개)정도였다. 조선시대 벼슬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귀양과 복권의 과정을 ..

진천(鎭川)의 유적지(遺蹟地) 등 (2020.10.16.)-1

1. 개요 진천의 유적지는 크게 홍보하는 것도 10개나 되고 소소한 걸 웬만큼 추슬려도 30개 소는 족히 될 듯하다. 신라시대의 명장 김유신의 탄생지, 송강 정철의 사우 등은 우리의 선조들이 관심을 가졌던 곳이리라. 20년도 지난 1900년도 말 짬을 내 몇 곳을 다녀간게 전부여서 시간을 내어보려고 정리해 보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좀더 많은 곳을 다녀볼 계획으로 나섰으나, 늦여름 수해로 처음부터 쓴 맛을 보여주는 공사현장, 중간에서 되돌린 한반도 지형전망대도 나오는 길에 수해로 차랑진입 불가를 인지했다. 김유신과 관련된 유적지 두 곳,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 유적지, 만뢰산자연생태공원과 보탑사를 보고 배티성지의 앞길(325지방도)을 통과해 집으로 오는 여정이었다. 2. 요약 집/09시15분-용선네/09시..

봉화여행(축융봉,청량산; 2020.10.07.~10.08.)

1. 여정: 10월07일[ 새벽부터 길 떠날 준비에 부산했지만 다소 출발이 늦어서 출근차량 틈에서 신갈•수원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극심한 경부에서 영동고속도를 타니 거기도 마찬가지, 예전에는 양지를 지나면 다소 정체가 풀렸는데 오늘은 이천에서 버스가 출차 대기를 하는 정도였다. 중앙내륙고속도로 진입하니 길이 이후로는 거의 전세낸 고속도이다. 천둥산에서 화장실 들렸다가 차로 돌아와 준비한 아침을 먹는다. 주변 차량들도 사정은 거의 비슷해 휴게소 운영자들 경영이 매우 힘들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봉화에선 바래미길의 고택을 몇 군데 들려서 고산정을 들렸다가 청량산 집단시설지구 소재의 ‘까치소리’에서 더덕구이 시켜 먹었다. 그리고 산성입구에 주차하고 공민왕당을 거쳐 축융봉에 올랐다. 내려설 때는 산성으로 ..

부여와 공주 다녀오기-5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지와 StartFragment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 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 르는 해발 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 의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 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630)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 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부여와 공주 다녀오기-4

궁남지 옆 화지산(해발 48m)은 백제 5천 결사대상을 충혼탑으로 하고 있으며, 백제 말기 도읍이었던 부여의 궁궐 남쪽에 당시 별궁 연못인 궁남지가 있고, 그 동편으로 화지산이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화지산 일원에는 백제 이궁지(離宮地)인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물지,돌덧널무덤,목책시설 등 백제시대 뿐만 아니라 청동기 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았으나 패망국의 유적이 얼마나 찾을 수 있을지는 세월이 상당히 흐른 뒤에야 판명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동요비(薯童謠碑) 여기는 옛 백제서울 사비의 궁남지이다. 삼국유사에 이 남지가에 살던 과부가 못의 용과 사랑하여 낳은 이가 서동이며 나중에 백제의 무..

부여와 공주 다녀오기-3

“궁남지(宮南池)”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AD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선인이 사는 곳」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부여와 공주 다녀오기-1

1. 서언 StartFragment 아주 예전 얘들이 어렸을StartFragment 아주 예전 얘들이 어렸을 때 버스로 찾았던 공산성은 그동안 많이 손을 보아 입구와 공북루가 있는 곳 밖에 기억이 없으나 진남루길로 들어서 10여 분 걸어서 진남루에 들렸고 백제 왕궁 건물지가 있는 쌍수정도 들렸다가 성곽길 따라 금서루까지 도착해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했다.StartFragment 아주 예전 얘들이 어렸을 때 버스로 찾았던 공산성은 그동안 많이 손을 보아 입구와 공북루가 있는 곳 밖에 기억이 없으나 진남루길로 들어서 10여 분 걸어서 진남루에 들렸고 백제 왕궁 건물지가 있는 쌍수정도 들렸다가 성곽길 따라 금서루까지 도착해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했다.StartFragment 아주 예전 얘들이 어렸을 때 버스로 찾..